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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길 위에서' "몰라, 그냥 헤매는거야" 美 비트세대의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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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길 위에서' "몰라, 그냥 헤매는거야" 美 비트세대의 방황

입력
2009.11.1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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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지음ㆍ이만식 옮김민음사 발행ㆍ전2권ㆍ각 304, 360쪽ㆍ1만500원, 1만1,000원.

'길'은 정체성을 상실한 존재들이 그것을 살피고 찾아가는 과정을 표현해온 오랜 예술적 상징이다. 길의 모티프는 산업화 이후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이들이 마음속 고향을 찾아가는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부터, 불치병에 걸린 두 남자가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등 동서양의 수많은 예술작품에서 변주돼왔다.

잭 케루악(1922~1969)은 1950년대 등장한 미국의 반(反)문화적 청년세대인 '비트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1957년 발표, 미국 독서계를 강타한 <길 위에서> (원제 'On the road')는 비트세대의 고뇌와 방황을 그린 여로소설이다. 비트세대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해 경제성장의 과실을 맛보았던 1950년대 풍요로운 미국의 물질중심적 가치관, 체제순응적인 가치관에 반기를 든 일군의 '랭보적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도시문명에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개인적인 각성을 통해 새로운 자유와 진리를 찾겠다는 구도적인 삶의 태도를 지향했다.

<길 위에서> 의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이혼의 아픔을 글쓰기로 달래며 미국 일주에 도전하는 작가 지망생이다. 거칠지만 매력적인 청년 딘 모리아티가 그의 여행 동반자. 두 젊은이는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 덴버에서 멕시코시티로 미국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만난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나드는 섹스, 술과 각성제, 마약의 상용 등 일탈행위로 자유를 만끽하는 샐과 딘은 길 위에서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십대들을 만난다. 작가 케루악의 분신인 샐의 눈에 비친 그들에게는 생의 활기가 없다. "네가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야?"라는 샐의 물음에는 "모르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미국의 소년과 소녀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슬프다. 순수함을 잃으면서, 그들은 적절한 사전 대화 없이 즉시 섹스에 돌입하게 되었다. 유혹하기 위한 대화가 아닌, 정말로 진솔한 영혼의 이야기 말이다"라고 샐이 읊조리는 대목은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트세대는 도시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1960년대 히피들의 원형이다. 케루악이 꿈꾸었던 낭만적 가치 역시 도시문화가 아니라 자연과 연관돼 있다. '거대한 로키산맥의 눈덮인 봉우리가 보이는 몬태나' '사랑스러운 미루나무와 유칼리나무가 사방에 자라고 있는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의 자연풍광에 대한 묘사는 더없이 아름답다. 대조적으로 그는 뉴욕을 '먼지구름과 갈색 연기를 토해내는 광기에 찬 도시'로 묘사하는 등 도시문명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샐이 찾으려 했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은 딘이다. 딘은 소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며 인생에서 오로지 섹스만이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두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인물이지만, 케루악이 보기에 그는 소유욕과 집착을 버리고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모험정신에 충만한 원형적 미국인이다.

<길 위에서> 는 32개국에서 번역됐으며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년 10만부 이상 팔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중역본으로만 출판됐다 그나마 절판돼 아쉬움을 사왔다. 이만식 경원대 영문과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최초의 정본 번역본으로 5편에 이르는 해제와 작품해설을 실어 케루악 입문서로서도 나무랄 데 없다.

매사추세츠 출신인 케루악은 미식축구 선수로 컬럼비아대에 진학했다 부상,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건설노동자, 상선의 허드레 일꾼, 산림감시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또다른 비트세대 작가로 <길 위에서> 의 딘의 모델이 된 닐 캐시디와 교유하며 1940년대 후반부터 여러 차례 미국과 멕시코 등지를 여행했다.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넣는 일에 짜증이 난 케루악이 종이를 이어붙여 36m가량의 두루마리 원고를 만든 뒤 <길 위에서> 를 쓴 것도 유명한 일화. 그는 각성제에 의지해 불과 3주 만에 이 장편을 완성했으나 정작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7년 뒤에야 출간됐다. 케루악은 과도한 음주로 인한 장출혈로 4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50년 전 미국 젊은이들의 방황은, 물질문명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거처를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둔중한 울림을 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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