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겨울 추위가 불어닥친 지난 2일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내 하얏트리젠시제주 호텔. 관광버스에서 내린 20여명의 주부들이 들뜬 모습으로 호텔 체크인을 준비 중이다. 이곳을 찾은 주인공은 아주그룹(회장 문규영)이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부모회의 추천을 받아 초대한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23명의 어머니들. 장애 자녀를 돌보느라 평소 여가는 물론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기 어려웠던 어머니들이 모처럼만의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이날 김포공항을 출발하며 처음 서로를 알게 된 사이지만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이야기와 주고 받는 미소는 가까이 지내온 이웃사촌간의 소통인양 자연스럽고 친근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아주복지재단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각자 방에 짐을 풀며 시작된 이들의 여정. 2박3일간의 짧지만 아주 특별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주그룹 지원으로 제주 여행… 처음 보는 사이지만 맘은 하나
체조·무용 통해 위축된 마음 활짝 "돌아가면 힘내서 돌봐야죠"
22년만의 첫 외출
간단한 주변 관광을 마친 어머니들이 행사 주최측인 아주그룹 계열 하얏트리젠시제주 호텔이 마련한 만찬 자리로 모였다. 호텔 총지배인의 환영 인사말에 이어 각 테이블마다 근사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밖에서 이렇게 편하게 식사해본 지가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좋은 것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맘 편히 먹을 수 있는 호강까지 할거라곤 기대도 안 했어요." "남편하고 같이 오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드네요." 샐러드에 수프, 스테이크가 차례로 오르자 모두들 저마다 한두 마디씩 건넨다.
"정말이지, 애 낳고 딱 22년 만에 처음 하는 외출이에요." 경기 안양시에서 온 송경숙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송씨는 "지적장애 1급인 아들을 낳고서는 가족간의 오붓한 외식은커녕 명절 친척 방문이나 근처 나들이조차 가지 못했다"며 "제주까지 오는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게 마냥 흐뭇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지적장애 1급 아들을 둔 박용순씨도 "우리 처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가는 여행이야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장애아가 있는 가족들로서는 1시간 오가는 여행도 엄두를 못 내는 게 현실"이라며 "이렇게 2박3일이나 여행도 하고 맘껏 쉴 수 있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고 말을 이었다.
경기 의왕시에서 온 김선씨도 "이 곳에 온 대다수가 지적장애와 뇌병변장애, 자폐성장애를 가진 자녀를 두고 있어 사실상 개인적인 시간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경우"라며 "짧은 기간이지만 재충전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돌아가면 불편한 아이들을 보살피는데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이날 참석한 장애아 부모 가운데 최연소자인 조순성씨는 "평소에는 외부모임이 있어도 자격지심이 들어서 말도 안하고 소극적이었는데 오늘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언니, 이모와 같은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라 그런지 닫혔던 마음의 문도 열리고 쌓였던 스트레스도 훌훌 털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다시 갖기 어려울 것 같아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서로 하나가 되다
얼마 만인지 모를 정도로 즐겁고 화기애애한 저녁식사가 끝났다. 이어 마련된 자리는 집단무용을 통한 심리치료 시간. 3시간 남짓 잡힌 스케줄이 부담됐을 법도 했지만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대형 리셉션홀에 모이자 모두들 이내 '집중'이다.
미국 공인 무용치료 전문가인 류분순 교수의 지도로 몸풀기와 체조, 무용을 통한 심리 치료가 시작됐다. 저마다 뻣뻣한 몸을 앞뒤로, 옆으로 뻗으며 류 교수를 따라 하지만 영 어설프다. "둘씩 짝을 지으세요. 상대방이 나라고 생각하고 서로 몸을 풀어주세요."
지도 교수의 말이 떨어지자 그동안 말하지 못한 스스로의 내면의 아픔을 달래주려는 듯 서로가 열심이다. 이마엔 어느새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음의 위축에 따라 쪼그라든 육체를 펴주기 위한 스트레칭엔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아 힘든 표정들이었지만 마음만은 싱글벙글이다.
"서로 안아주세요. 그동안 지쳤던 스스로를 안아준다고 생각하세요." 류 교수의 말에 서로를 껴안은 장애인 부모들. 짧은 고요함 끝에 이내 한두 명의 눈가가 촉촉히 젖더니 금새 울음바다가 됐다. 지금까지 수십년간, 또 앞으로도 계속될, 쉽지 않은 자녀 돌봄의 길을 걸어야 할 똑같은 운명의 '서로 다른 나'를 만나 위로하고 서로의 정신적 고통을 눈물과 함께 씻어 내렸다.
부족한 제도ㆍ손길 아쉬워
서로 느끼는 점이 같아서일까, 23명의 어머니들은 여행을 다닐 때나 식사를 할 때마다 살며 느끼는 어려움과 아쉬운 부분에 대한 공통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성년 장애인 자립 문제나 턱없이 부족한 장애인 돌보미 바우처제도 등에 대한 이야깃거리는 여행 기간 이들이 나눈 대화?단골 메뉴.
서울 노원구에서 참석한 조현숙씨는 "지금 현실은 특수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성인이 되어서 마땅히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며 "장애 정도를 세분화해 사회적 자립도를 높여줄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아주그룹 산하 아주복지재단의 노미라 과장은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잘못 방치되면 이혼과 가출, 자녀 유기등과 같은 가족의 와해와 사회적 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만큼 정부나 더 많은 기업이 장애 가족에 보다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장애인부모회 권유상 사무처장은 "장애인을 돕는 기관이나 프로그램은 많지만 함께 고생하는 장애인 부모를 위한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마침 아주그룹측과 뜻이 맞아 장애부모를 위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며 "지속가능한 지원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 많은 지원이 따라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의 지원 역할이 크지만 아직까지 기업과 종교단체가 먼저 나서고 정부나 지자체가 뒤늦게 따라가는 게 현실"이라며 "특히 장애인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와 보호자를 대신해 재산관리와 권익보호 등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주=전태훤기자 besame@hk.co.kr
■ 아주그룹의 '맞춤형 공헌'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돼야 한다"는 창업주 문태식 명예회장의 이념을 바탕으로 시작된 아주그룹의 사회공헌은 계열사별로 차별화한 '맞춤형 공헌'으로 특화해 있다.
우선 그룹은 기업의 핵심 가치인 '인재육성'에 포커스를 두고 저소득 가정의 자녀 학습지원을 위한 공부방 운영사업과 중ㆍ고교생 장학금 지원사업, 교육환경 개선 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인재육성 관련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계열사인 아주산업은 지난해 건자재ㆍ래미콘 기업으로는 최초로 친환경 사회공헌 브랜드 '그린시티'를 도입하고 공장 주변 주거환경 개선활동에 힘을 쓰고 있다. 9월에는 인천시와 함께 인천사업소 담장 녹화사업을 추진, 공장 주변 도시 미관 개선에도 일조했으며, 사업소 외벽 펜스를 철거하고 펜스 자리엔 측백나무와 담쟁이, 자연석 등으로 꾸며 현장을 보다 친숙한 공간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보통신(IT) 관련 계열사인 아주아이티는 'AJU 쉬운 IT'란 사회공헌 활동을 지난해부터 펼쳐나가고 있다. 파워포인트 등 실생활에서 자주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위주로 컴퓨터 교실을 운영, 컴퓨터 소외계층을 도와주고 있다.
할부금융업을 주력으로 하는 아주캐피탈은 저소득 가정 및 소외아동을 대상으로 정서적ㆍ물질적 지원을 위한 '리본 캐피탈'을 만들었다. 리본 캐피탈은 아주캐피탈과 아이들이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 태어난다라는 뜻의 '리본(Reborn)'과 서로 함께 묶는다는 의미의 '리본(Ribbon)' 개념을 더한 것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돼있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아주캐피탈 전국 지점의 임직원들이 자원봉사자로 직접 참여하는 제도. '놀이로 배우는 알기 쉬운 경제 교실'이나 '신나는 문화탐방'(공연, 전시회, 만들기 등), 다양한 캠프활동 등의 프로그램으로 꾸려진다.
또 아주캐피탈 여직원회는 급여 끝전 모으기를 통해 자매 결연을 맺은 보육원과 양로원 등을 찾아 청소와 식사제공, 물품 지원 활동을 해마다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아주의 사회공헌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봉사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아주그룹과 한민족복지재단 임직원 20여 명으로 구성된 해외자원봉사단은 지난해 베트남에서 해외자원봉사 프로그램인 '아주 Happy 베트남'을 진행하며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과 북부 하이즈엉성에 유치원을 지어주고 주변 환경개선 봉사활동까지 펼쳤다. 2007년에는 8,000만원의 지원금을 마련, 현지에 유치원 6곳을 지어 1,000여명의 베트남 아이들이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기여했다.
전태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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