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첫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첫눈

입력
2009.11.12 01:36
0 0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첫날 며칠만 보내고 떨어져 사는 신혼 밤

첫날밤 내내 살을 녹이던 당신은

이내 내 곁으로 와서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 지금도 강원도에 첫눈이 내린다는 뉴스를 보면 가슴이 떨려요. 살아오면서 딱 한 번, 첫눈 때문에 여행한 적이 있었어요.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차를 타고 영동고속도로를 달렸지요. 그 차에는 그 날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타고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1990년 겨울의 첫눈이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가 됐죠.

혹시 곤란에 처한 1990년 겨울의 첫눈이 누군가와 소송에 휘말려 법정에 간다면, 저는 기꺼이 진술하겠어요. 그 해의 첫눈은 참으로 아름답게 내렸노라고. 그게 서른 살이 되던 해 10월의 마지막 노을이든, 하루 사이에 하얀 꽃들을 잔뜩 매달고 선, 졸업하던 해 고등학교 교정의 벚나무든, 뭔가의 목격자가 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