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이 성폭력 피해 아동을 조사하면서 실수나 착오로 불필요한 중복조사를 해 정신적 고통을 줬다면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03년 3월 당시 네 살이던 A양은 성당 부설 유치원을 다녀와 성기 부위의 통증을 호소했고,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며 "검은 괴물이 배에 들어왔어"라는 말을 했다. A양의 부모는 딸이 유치원에서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보고 A양이 지목한 성당 신부를 고소했다.
사건을 맡은 경찰은 A양을 상대로 피해자 조사를 했으나, 실수로 캠코더에 담긴 진술 녹화 내용을 지워버려 재차 피해자 진술을 받았다. 이후 경찰과 검찰은 추가 수사를 벌였으나 결국 증거부족으로 가해자로 지목된 신부를 무혐의 처리했다.
A양 가족들은 "경찰이 편파 수사를 하고 조사를 미루는 등 가해자에게 증거를 은폐할 시간을 줬고, 불필요하게 추가 조사를 하는 바람에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은 "아동의 경우 최초 진술이 진실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경찰이 이 내용을 녹화하지 못한 과실이 인정된다"며 "국가는 A양에게 300만원, 그 어머니에게 2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은 아버지가 입은 정신적 피해도 인정해 위자료 100만원을 추가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이 사건 상고심에서 "녹화내용이 지워져 반복조사를 한 부분 외에 편파조사 등 다른 절차상의 불법행위 책임은 없다고 본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며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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