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 콤플렉스'에 여전히 발목이 잡혀 있는 우리 사회 일각의 안쓰러운 현실을 새삼 일깨운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가 8년에 걸친 작업을 통해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행적을 발굴하고 정리해냈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이고 격려 받아 마땅한 일이다.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아픈 상처를 확인하고 드러내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는 민문연의 발간 취지는 이번 작업의 가치를 웅변한다.
하지만 그 제목이 굳이 감정적 반발을 초래할 '친일인명사전'이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기엔 삶이라는 장구한 역정의 다면적인 양상을 일축하고 해당자들의 인생 전반을 '친일'로 선명하게 낙인 찍어야겠다는 난감한 적개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제목 대신 행적의 진실을 짚어내되 해당자의 삶 전체를 도식적으로 규정하지는 않는 '일제강점기친일행위사료집' 정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해당자 측의 격한 반응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엄정한 사관에 입각해야 할 일부 언론사가 사실에 대한 겸허한 성찰을 접어둔 채 민족문제연구소 측을 좌파로 매도해버리는 상황은 우리 언론이 얼마나 맹목적인 편가르기에 젖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드러낸다. 대체 과거의 흠결에 관한 단 한 조각의 사실과 혐의조차도 수용할 수 없다는 그런 자세로 역사와 현실을 재단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신화(神話)라 한들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사실 우리 사회의 다수는 이제 현대사 인물에 대한 이런 식의 강퍅한 논란에서 어느덧 벗어나 보다 유연한 평가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최근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미당시문학관 일대에서 펼쳐진 '미당문학제'는 '과거 콤플렉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숙한 소화력을 보여준 마당이라 할 만하다.
미당의 제자이면서도 시집 '농무' 등을 통해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시인으로 평가 받는 신경림 시인은 이번에 처음 축제를 찾았다. 그는 "여기 오기까지 몇 년을 망설였다"며 "가슴에 앙금같이 앉았던 것이 있었는데, 미당 선생님과 소통을 하고 나니 이렇게 후련하다. 갈라놓은 세월이 모질었다"고 했다고 한다.
제자와 스승을 갈라놓은 미당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그는 "비록 친일은 했지만, 그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시를 남겼다"며 미당의 삶은 시로써 주로 평가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부 언론은 사전 발간 보고대회 때 김구 선생 묘역에 나붙었다는 '다카키마사오(박정희) 일본 육군 소좌를 국립현충원서 추방하라' 같은 구호를 거론하며 난리라도 난 것처럼 개탄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한국과학기술원(KIST) '연우회'에서는 KIST를 설립함으로써 과학기술발전의 초석을 닦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 설립을 추진하는 등 긍정적 평가 작업도 각계에서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
성숙한 사회에서 한 인물의 역사적 삶은 몇몇 흠결로만 매도될 수도 없고, 가공된 신화로 왜곡할 수도 없는 유장한 평가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박정희와 서정주라는 두 거인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통해 확인한다. 우리 사회는 일각의 날 선 대립에도 불구하고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넘기 어려웠던 흑백논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미 나아가고 있다.
장인철 피플팀장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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