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여파가 웬만큼 가라앉았을 무렵 이 난에 는 칼럼을 썼다. 집권 초의 숱한 질곡을 거치면서 비로소 이명박 대통령 특유의 역량을 발휘할 여건이 조성돼가고 있다는 판단이 근거였다. 단정적인 제목은 국가적으로 어쨌든 이 정권이 성공해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까지 얹은 것이었다.
이후 MB의 친서민 중도노선 행보와 경제회복 조짐, G20 등에서 보인 외교능력, 남북관계에서의 일관된 자신감 등이 확신을 키웠다. 그런데 덜커덕, 예상치 못한 세종시 문제가 돌출했다.
당략에 휘둘려온 세종시 문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슈는 잘못 건드렸다. 명분과 실질 어느 쪽으로든 승산이 희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MB는 대선후보 전부터 임기 시작 이후까지 줄곧 세종시 추진을 공언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3년여 동안 6~7차례나 된다. 그냥 통상적 약속도 아니었다. "반드시" "혼신의 노력으로" "그런(불이행) 걱정 안 해도" 등 마치 믿지 못하는 상대가 답답하다는 듯 극상의 표현으로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지금 와서 한나라당 수정파들은 원안 추진을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지만 자신들 주군의 허언 남발과 그에 박수친 행태에 견줄 만한 포퓰리즘이 또 있을까. 더욱이 "당시 (표를 생각해) 세종시에 합의하되, 정권을 잡으면 되돌리자는 선택을 했었다"는 자기고백까지 나왔다. 그야말로 당략에 따라 국민을 갖고 노는 건방과 오만이 느껴져 불쾌감을 참기 어렵다. 당부하건대 그 표리가 같지 않은 입에 '백년대계'같은 고귀한 용어는 올리지 않는 게 좋겠다.
실질적 측면을 따져봐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세종시의 핵심은 정부부처 이전이었다. 그래야 그나마의 유인ㆍ저변효과로 취지와 이름에 걸맞은 도시의 꼴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뻔한 사실을 외면한 채 기업, 대학을 다그쳐 명품도시로 만들겠다는 건 또 기만이다. 그조차 이미 원안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이나 대학, 연구소 등을 유치하겠다는 유사한 성격의 도시계획지역이 기업도시, 혁신도시, 산업도시, 거점도시, 혁신클러스터 등의 온갖 이름으로 전국 도처에 널려 있다.
물론 선거 때의 약속을 대놓고 뒤집은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총재가 내각제개헌을 약속하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DJP연합을 이뤘으나 당선 후 번복한 것도 한 예다. 그때 번복명분은 국민여론이었다. 어차피 내각제에 대한 지지도는 낮았고, DJP를 지지한 국민도 정권 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약속에 크게 연연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양측의 의견이 워낙 팽팽해 MB진영으로서는 여론의 힘을 빌리기도 어렵다. 도리어 호각으로 맞선 여론분할은 갈등의 폭발을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징후다. 우리사회의 이슈들이 대개 그렇듯 세종시 문제도 보수ㆍ진보 간 싸움으로 변질돼 나라를 이전투구의 늪으로 끌고 들어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당장의 현실적 계산으로도 세종시 문제는 별 실익 없이 정권에 엄청난 부담으로만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실익 없는 논란 조기에 접어야
MB의 특기는 남들이 생각 못하는 이슈를 창출해 과감하게 밀어붙임으로써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서울시장 때 청계천 복원, 버스노선 정비와 중앙차로제, 그리고 대운하에서 축소되긴 했지만 4대강사업 같은 것들이다. 세종시처럼 이미 절차적 논의가 다 끝난 사안을 다시 끄집어내 곱씹는 건 그의 스타일도 아니다.
그러니 세종시 문제는 조기에 논란을 접는 게 옳겠다. 내달 초 대통령의 입장표명은 "이런저런 걱정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갈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가 커 더 이상 이 문제를 재론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되길 바란다. MB정부가 간신히 고비를 넘어가는 와중에 자칫 수렁으로 빠져들 고비를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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