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중등 임용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모(27)씨.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잠을 깨서 졸린 눈을 비비며 맨 처음 하는 일은 '문자 보내기'다. "전 일어났어요. 정말 (시험이) 얼마 안 남았네요. 오늘 하루도 열공하삼!(열심히 공부하세요)" 잠시 뒤 날아온 문자 답신. "만날 책상에 앉아 있는데 늘라는 성적은 안 늘고 뱃살만 느네요ㅎ" 임씨는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님아, 힘내요ㅎ 뱃살은 잠시 접어두고 단 거 챙겨드세요. 스트레스에 좋대요ㅋ"
서울 도봉구 창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임씨는 올해로 '백수 3년차'다. 이번에는 기필코 임용시험에 붙기 위해 집과 독서실만 왕복하고 있고 석 달 전부터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모두 끊었다.
임씨가 공부 외에 챙기는 유일한 것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다. 점심시간 독서실 근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서 문자 한 두통씩 주고 받고 밤 10시께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혼자 시험 공부를 하는 임씨에게 문자는 타인과 나누는 유일한 대화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창인 셈이다.
하지만 임씨는 문자를 주고받는 상대방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한다. 오직 휴대폰으로만 통하는 '문자 친구'다. 임씨는 "임용고시 관련 카페에서 '문자 친구' 구하는 글을 올려 사귀게 됐다"며 "같이 임용시험 준비하는 것 외에 상대에 대해 아는 거는 없지만, 시험이 끝나는 12월까진 유일한 내 친구"라고 했다.
교원 임용고시, 7ㆍ9급 공무원 시험 등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이른바 '문자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문자 친구'는 고달픈 수험생활을 혼자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아침 저녁 문자를 보내며 격려하는 방법이다.
기상시간 체크, 자기 전 하루 목표량을 달성 했는지 반성하는 문자는 기본이다. 어떤 이들은 '영어단어 5개', '사자성어 뜻풀이' 등 간단한 문제도 내서 서로 답을 맞히며 '스터디 모임' 식으로 꾸려가기도 한다.
'9꿈사'(9급 공무원을 꿈꾸는 사람들) '한마음 교사되기'(교원임용고시 준비생 모임) 등 주요 포털의 취업 준비 관련 카페에는 '6시 모닝문자 하실 분' '문자 기상체크 할 분 구해요' 등 '문자 친구'를 구하는 글이 하루에도 10여건씩 올라온다.
"기상은 6시구요, 방법은 서로 문자로 영어단어 2개 보내면 단어 뜻을 5분 이내에 찾아서 보내는 걸로 해요" "월~토 오전 6시30분에 기상체크 하구, 밤엔 하루 공부한 시간을 스톱워치로 찍어서 보내주는 방식입니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열심히 공부할 분만 연락주세요" 등 문자 친구의 조건과 방식도 다양하다.
'문자 친구'는 수험생들끼리 서로 깨워주고 진도도 체크해준다는 점에서 스터디의 일종이지만, 서로 만나서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차이다.
경찰직을 준비하는 김종석(29)씨는 "스터디에 나갈 경우에는 남녀가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터디'가 되기 싶다'며 "사람을 직접 만나다 보면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피곤해지기도 해서 아예 얼굴을 안 보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문자 친구를 택했다"고 말했다. 얼굴을 마주 보는 대인관계조차 이들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얘기다.
문자 친구의 익명성은 그래서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은 이들의 '비빌 언덕'이다. 임씨는 "임용고시를 준비하지 않는 친구들은 공감대 형성이 어렵고, 함께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대화하다 보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같은 시험을 준비하지만 서로를 모르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문자 친구가 '나홀족 시험'족의 유일한 대화 상대지만, 그렇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사적인 얘기는금물이다. 특히 상대가 이성임을 눈치 채고 '작업성 멘트'를 날렸다가는 곧바로 퇴짜 맞기 일쑤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서모(29)씨는 "예전에 문자를 나누다 상대가 여자인 것 같아서 호기심에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가 곧바로 연락이 끊긴 일이 있었다"며 "어차피 시험 준비를 위해 맺어진 단기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젠 남자인지 여자인지 전혀 의식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문자 친구는 휴대폰의 유행 속도만큼이나 쉽게 모였다 쉽게 깨지는 '일회용' 친구다. 신림동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박모(30)씨는 "처음에 5명이 6개월 계획으로 문자 친구를 시작했는데,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은 2명뿐"이라며 "휴대폰 번호 외에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이 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씨는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을 구할 수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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