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통령중심제라고 해도 미국은 우리와 달리 의회가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다.
백악관의 예산관리처(OMB)가 정부의 예산 요구를 담은 예산제안서를 의회에 제출하지만, 이는 참고사항일 뿐 구체적 예산을 편성하고 확정하는 것은 의회 예산처(CBO)의 권한이다. 의회가 국민의 세금에 기초한 나라살림을 짜야 대의정치의 취지에 맞고 선심 예산 등의 시비도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의회 예산처가 예산법안을 만들고 상ㆍ하원이 이를 심의ㆍ처리하는 이런 관행은'예산 법률주의'로 불린다.
▦ 반면 우리나라는 정부가 예산편성권을 갖고 국회는 심의ㆍ의결권만 갖는 '예산 의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오랜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의 소산이다. 효율성이 중시되던 고속성장의 과정에서, 또 대의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한 혼돈의 정치사에서 이 제도가 불가피했고 유용했던 측면은 분명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국회는 날치기 반복 속에 통과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곁가지만 건드리고 부스러기만 주워 먹는 신세를 벗지 못했다. 예산은 국회 손아귀를 벗어났고 의원들이 까막눈 취급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 하지만 오랜 산고를 거쳐 2003년 국회에 의정지원 재정전문기관인 예산정책처(예산처)가 출범하면서 기울었던 추가 점차 균형을 회복해가는 추세다. 미국 CBO를 역할모델로 삼는 예산처의 영문명은 NABO(National Assembly Budget Office)다. 일반인들에게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NABO 출범 6년째인 올 들어 정부 예산안을 따지고 심의하는 국회의 칼날이 매서워졌다. 과거 같으면 묻혀 넘어갔을 불요불급한 사업내역이나 숨겨둔 항목이 드러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재정지출 수치의 허점도 NABO의 그물망을 피해가기 힘들게 됐다.
▦ 얼마 전 조기 재정집행의 실적 평가를 놓고 정부와 일전을 벌인 NABO가 지난 주엔 내년 예산에서 4조원을 삭감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57개 사업에서 낭비 비효율이 발견된 데다 저출산ㆍ고령화 등 미래과제 대비를 위해 재정건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또 하천 정비사업 등 사실상 4대강 예산으로 잡혀야 할 항목이 환경부 등의 고유사업예산으로 위장돼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고 여당도 좀 당황스런 표정이다. 하지만 국민에게 나라살림 개요를 설명하는 시정연설을 여전히 총리가 대독하는 정치문화라면 국회는 더 날을 세워야 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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