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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 환자들 갤러리로 '세상 나들이'/ "마비된 몸 속에서 희망이 살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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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 환자들 갤러리로 '세상 나들이'/ "마비된 몸 속에서 희망이 살아났어요"

입력
2009.11.0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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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비가 내린 8일 오전 천안에 사는 원창연(45)씨는 걱정스레 하늘을 쳐다봤다. '얼마나 기다린 바깥 나들이인데….' 말 없이 낙심했지만, 아내가 기어이 휠체어를 끌어냈다. 최근 들어 오른팔까지 마비돼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라곤 왼팔뿐이지만, 아내와 딸이 곁에 있었다. 원씨는 투명 비닐로 된 휠체어 덮개를 우비처럼 몸에 덮고 집을 나섰다.

원씨 가족이 전철 등을 타고 4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아트 갤러리. 일요일은 미술관이 쉬는 날이지만 이날만은 특별히 문을 열었다. 한국ALS(루게릭병)협회를 후원하고 있는 인터알리아 재단이 루게릭병 환자와 가족들을 초청해 전시회 관람, 음악회 등 작은 문화 행사를 가진 것이다.

재단측은 이들을 위해 갤러리의 문턱을 없애고,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널찍한 공간도 마련했다. 박은주 재단 이사장은 "거동이 불편해 외출이 어려운 루게릭 환우와 그 가족들이 바깥 세상과 소통하고 서로 힘이 돼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원씨를 비롯해 가족과 함께 이 곳을 찾은 환자는 10여명. 이들은 모두 운동세포가 하나씩 파괴돼 근육이 마비되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으로 투병하고 있다. 대부분 40~50대 환자들로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무기력, 근육마비 등의 증상을 호소하다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았다.

외국계 회사 이사였던 전표규(51)씨도 병마가 닥쳤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2년 전 골프를 치다 허리에 통증을 느꼈을 때만 해도 흔한 근육통 정도로 여겼다가 지난해 출근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고, 결국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그 후부터 병은 빠르게 진행됐다. 팔을 들어올릴 힘이 없어 혼자 식사하기도 힘들어졌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기도 두려웠다. 남편의 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던 아내 김영희(52)씨는 "남편 탓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워 처음에는 매일 싸우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연숙(48)씨도 발병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병이 믿기지 않는 듯 "매일 아침 일어나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병을 받아들이기까지는 1년 이상 걸린다. 5년 전 공장에서 근무하다 루게릭병에 걸린 원씨는 "처음에는 만사 귀찮아 집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그저 비참한 기분만 들었다"고 했다. 원씨는 그러나 "장애인협회 등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 '내가 최악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언제 죽을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일 뭐할지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나들이'는 그래서 삶을 긍정하게 하는 소중한 발걸음이다. 진주, 크리스털, 종이 등을 재료로 한 수공예작품 50여점이 전시된 갤러리를 둘러보는 환자와 가족들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루게릭병을 앓은 지 3년째인 홍병희(64)씨는 아내에게 "저거 봤어?" "신기하지?" "일일이 손으로 다 만든 거야?" 라며 연신 물어봤다.

이들을 위해 주최측은 간단한 음악회도 마련했다. 그 뒤 이어진 간담회에서 환자들은 정부의 지원 부족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공장노동자로 일하다 병에 걸린 황수두(58)씨는 "병과 일 사이에 확실한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처리가 안됐다"며 "돈벌이는 하나도 없는데 치료비는 한 달에 수십만원씩 꼬박꼬박 들어가니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광희 한국ALS협회 사무국장은 "환자 대부분이 40~50대 가장인데, 이들이 쓰러지니 당장 돈 벌 사람이 없고 가족들도 간병에만 힘써야 할 상황"이라며 "정부가 지난해까지는 간병비 30만원을 지급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선별 지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에게 삶의 희망은 오로지 '가족'이다. 원씨는 "예전에는 주말 없이 일했는데, 이젠 몸이 허락하는 한 가족과 함께 서울 곳곳을 찾게 됐다"며 "돈 없고 힘들지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 게 행복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의 병수발을 10년째 하는 이영민씨도 "아내가 글자판으로 어렵게 '사랑해'라고 표현할 때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라며 아내의 손을 연신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후원계좌는 신한은행 100-022-543111(한국ALS협회), 문의(02)741-3773.

강지원기자 stylo@hk.co.kr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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