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구치소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할 사방 끝의 작은 방에 수감되었는데, 방문 앞에는 중앙정보부 직원이 지키고 있어 상당 기간 교도관이든 소제든 일체 접근할 수 없었다. 식사 때만 밥과 찬, 그리고 식수를 들여 넣어주고, 세수는 방안에서 하게 했다.
나는 군대생활도 해 본 데다 극한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을 상당히 재미있어(?) 하는 터라 교도소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물러나게 하지 못하고 교도소에 갇혀버렸으니 비참한 생각이 들었고, 특히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걱정하게 해서 죄스러웠다.
요즘이야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면 무슨 영웅이나 된 듯이 인식되는 경우조차 있지만,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교도소에 구속된다는 것은 무슨 중죄를 지은 것으로 인식되게 마련이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갇혀 있게 생겼으니 교도소 생활을 보람 있게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책을 읽는 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이지만 교도소는 인생대학이라 할 만큼 많은 인생교훈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구속 후 상당기간 외부로부터의 서적 차입이 일체 안 되었다. 기소가 되고서야 방 앞에 지키고 있던 증앙정보부 직원도 없어지고 책도 차입되었다. 그런데 외부에서의 서적 차입이 안 되는 동안 교도소 당국에서 성경과 교정국 발행의 '새길', 그리고 몇몇 관본을 넣어 주었다. '새길'은 내가 교도소 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빼놓지 않고 읽은 월간지이거니와, 그때 읽은 관본들 가운데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 있다.
전북 임실 사람으로 미국 유타대학에서 유학을 하고서 돌아와 섬진강 유람을 하다가 그 곳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홍모씨(이름이 생각나지 않음)의 자전적 수기 '비에 젖은 흙벽돌'과 국군의 날 에어쇼에 참여했다가 죽은 어느 특전사 하사관의 일대기인 '하늘에 핀 의화(義花)'에서 나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
특히 '하늘에 핀 의화'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각별한 인식을 갖게 했다. 존엄하지 않은 인간은 없으며 아름답지 않은 인생 또한 없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판에 어떻게 임하느냐가 문제였다. 박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짜 맞춰 놓은 공소장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 검취(검사취조)를 나갈 때면 공범들끼리 비둘기장에서도 만날 수 있고, 또 검사실에서도 만날 수 있어 재판에 대한 대책을 충분히 논의할 수 있었다. 검사실에서 만날 때면 조영래 누님이 해온 음식을 나눠 먹은 일이 많은데, 검사가 우리에게 해 준 특전이었다.
결국 우리는 공소 취하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처음 해 보는 단식투쟁이라 공부가 필요하겠다고 보아 간디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물론 단식과 상관없이 간디의 저서는 읽을 만했다. 비폭력 불복종운동 등이 마음에 꼭 든 것은 아니지만 투쟁의 대상에 대해서조차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깊이 공감되었다.
나는 후일 내가 하는 정치의 기치를 '사랑의 정치'로 했고, 또 내가 쓴 많은 글에서 독재자의 퇴진을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편 일이 많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간디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이신범, 심재권, 조영래, 나 네 사람은 첫 재판에 나가서 인정심문을 끝낸 후 이 사건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공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하면서 공소를 취하할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재판을 거부했다.
그러고는 교도소에 들어와 단식에 들어갔는데,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감방에서 겨울철에 단식을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일단 다음 재판이 있을 때까지 2주 동안 단식을 할 요량으로 단식을 시작했는데, 2주째가 되자 재판이 1주 더 연기되는 바람에 단식도 1주 더 하게 되었다.
단식과 관련한 간디의 권고에 의하면 요구사항이 단순하고 분명할 뿐만 아니라 실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식을 오래 할 때는 물론이고 오래 하지 않더라도 단식 중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단식으로 죽어도 좋다는 확신이 설 때 단식을 해야 한다고 권했다. 일리 있는 권유임이 분명했다.
나는 교도소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단식을 많이 했는데, 짧을 때는 이틀도 하고 길 때는 21일도 했는데, 일주일이 넘는 단식을 할 때는 그 일로 '죽어도 좋은가' 하고 자문해 보고 죽어도 좋다는 결심이 설 때 단식을 했다. 단식은 생명을 건 투쟁인데 생명을 건 투쟁을 하면서 '설마 죽기야 하겠나'라는 불철저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1일을 굶고서, 법정에서 이신범, 심재권, 조영래 등을 만났는데, 다들 초췌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건강한 편이었다. 감방 안에 있을 때는 하루 20시간 이상을 누워 있을 정도로 기진맥진했지만 막상 출정(出廷)을 나갈 때는 정신이 바짝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다음날부터 밥을 먹기로 해 복식을 했는데, 복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과식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재판은 별 재미없이 진행되었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사건이 조작되었다며 재판을 거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심공판이 열렸는데, 네 사람 모두에게 10년씩의 구형이 있었고, 2주 후 이신범과 나는 징역 4년, 심재권과 조영래는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이신범은 징역 2년, 조영래는 징역 1년 6월, 나와 심재권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구형이 10년 이상이면 집행유예를 선고 받더라도 형이 확정될 때까지 석방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그 해 12월에야 심재권과 나는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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