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천민자본주의 시대 한국사회의 들끓는 욕망을 블랙유머의 미학으로 속속들이 해부했던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1987)과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1988)로 우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장정일(47)씨. 시집 <천국에 못가는 이유> (1991) 이후 시 발표를 사실상 중단했던 그가 18년 만에 신작 시를 선보인다. 천국에> 길안에서의> 햄버거에>
장씨는 이달 말께 나올 계간 실천문학 겨울호에 '탁' '가을모기' 등 10편의 시를 발표한다. 2002년 무렵부터 쓴 20여편의 시 가운데 솎아낸 것인데, 특유의 지독한 현실풍자가 우선 눈에 띈다.
시 '탁'은 시인 김지하씨가 지난 9월 지인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은 정운찬 총리 후보를 청문회에서 공격한 야당 의원들을 비판하며 한 일간지에 투고한 글 '천만원 짜리 개망신'의 한 부분('지우지 말기 바란다. 그래! 한마디로 '×' 같아서 이 글을 쓴다'는 구절)을 패러디, 장씨가 김씨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시다.
장씨는 김씨와 정 총리를 옹호하는 보수세력을 싸잡아 '모기'라고 명명한다. '탁'은 파리채로 모기를 잡는 행위다. '저 광막한 우주의 시간으로?(지우고),/ 검열당하는 역사교과서로?(지우고)./ 혹은 죽비로?(지우고)/ 매양 하던 그걸로/ 파리채로!(인간을?)// 지우지 말기를 바란다, X같은 늙은이 탁!/ 머리가 천만 개나 되는 총리, 탁!/ 마지막 줄은 아꼈다가, 탁!'
다른 시 '무대포'에서 그는 시작 활동 재개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의 심경을 토로하기도 한다. '행과 연을 시 비슷이 갖춰 놓고/ 몇 편이나 썼나/ 지전 세듯/ 노트를 넘겨본다// 갓 태어난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을 세고 또 세는 마음.// 한 편, 한 편/ 빙신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젊은 시절 장씨의 시가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의 산물이었다면 마흔 중턱을 넘어선 그 역시 이제 중년에 접어든 존재로서의 비애감을 느끼고 있나보다. '청춘'은 그런 심경을 표현한 자기풍자적인 시다. '두류산 야외 수영장 매표구에 줄을 섰는데/ 불쑥 나타난 젊은 건달이 새치기를 한다/ 순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수영팬티를 갈아입으며/ 뱃살이 접혀지고 허벅지는 마르는/ 내 기형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마흔이 되도록 나는 청춘인 줄 알았다/ 다시는 주먹을 쥐지 않으리라.'
실천문학 주간인 시인 손택수씨는 "장씨의 시에서 20년 전의 시적 완성도나 미학적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과하지만 그 아우라는 여전히 살아있다"며 "장정일이라는 한 개인의 귀환이 아니라 한국문학에 중요한 방점을 찍었던 시인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장씨는 "소설이나 희곡 같은 장르에서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었기에 '나를 버리고 떠난 시'가 그렇게 야속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이 다 채워지지 못하는, 시로써만 가능한 말이나 재미가 따로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며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 시의 꼴을 만드는 일만도 벅차지만, 앞으로 신작 시집으로 전모를 보여주겠다"고 시작 재개의 변을 밝혔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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