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이야기 찾아가자, 시간의 다리를 건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와 딱 어울리는 마을이 있다. 강원 영월군 주천(酒泉)면이다. 술 주(酒)자를 쓰는 지명은 아마도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맑고 깨끗한 주천강이 휘돌아 나가고, 너른 들판의 풍요로운 기운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름에서처럼 술심이 가득하고, 많은 이야깃거리로 넘실대는 마을이다.
최근 걷기 열풍을 타고 주천에도 트레킹 코스가 생겼다고 해서 다녀왔다. 주천강을 끼고 주천을 굽어볼 수 있는 길이다. 강변의 아름다운 단풍과 주천에 얽힌 재미난 일화를 몸으로 느끼며 걷는 길이다.
트레킹의 시작점은 주천강 제방 옆의 주천삼층석탑이다. 고려 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탑은 인근 수주면 무릉리의 삼층석탑과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 이 두 탑과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흥사를 연결하면 일직선이 된다. 두 탑은 법흥사를 찾아오는 신도들을 안내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전해진다.
석탑을 지나 주천강을 건너면 신일리 땅이다. 금산 밑자락에 의로운 호랑이를 기린 의호총이 있다. 호랑이와 상복을 입은 선비의 동상이다. 이곳엔 효심과 충심이 깊은 선비와 호랑이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전 금사하라는 선비가 살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자 선비는 주천강 건너 약방에 약을 지으러 가려 했다.
때는 장마철이라 물을 건널 수 없었고 선비는 강가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이때 호랑이가 다가와 선비를 건너게 해 줬고, 무사히 약을 지어 온 선비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 선비와 호랑이는 또 숙종이 상을 당하자 초막을 짓고 함께 3년 상을 치렀다고 전해져 온다.
의호총을 뒤로 하고 신일리 개울 돌다리를 건너면 술샘, 주천이 있다. 주천 비석 아래쪽 강가로 내려오면 바위 틈새에 있는 작은 샘이 바로 주천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따르면 이 샘에서 술이 나왔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나오고 천민이 오면 탁주가 나왔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천민이 양반 복장을 하고 와서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약주는 나오지 않고 평소와 같이 탁주가 나오자 화가 나 샘터를 부쉈고 이후 술은 끊기고 대신 찬 샘물이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주천의 샘물은 얼마 전만 해도 콸콸 넘쳐 흘렀다고 한다. 주천 사람들은 이 물을 길러다 식수로 먹고 자랐다. 약 10년 전부터 물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제 샘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다. 주천에는 술도가가 2곳이 있었다. 면 단위에 술도가 2개가 있는 것도 드문 일이다. 주천의 술심이 실제로도 셌던 것이다. 소주나 맥주에 밀려 양조장은 둘 다 문을 닫았는데 우연하게도 주천의 샘물이 말라붙기 시작하던 그 즈음이란다. 누가 양조장을 다시 열어 술심을 피워 올리면 주천의 샘물도 다시 솟아오르려나.
샘 위로 난 오솔길을 오르면 망산의 정상이다.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오솔길이 정겹다. 망산 정상 못 미쳐 체육 시설 옆 언덕엔 맷돌 크기의 동그란 돌이 하나 박혀 있다. 철종의 태를 묻었던 태실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망산과 주천마을 건너편 태봉산에 철종의 태가 묻혀 있다고 한다.
망산 정상의 빙허루에 올랐다. 2층 누각에 올라서니 붉게 물든 주천강과 주천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망산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잣나무 숲을 지나면 강변이다. 이곳에서 강 건너 주천마을까지는 쌍섶다리로 건넌다. 섶다리야 강원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쌍섶다리는 주천만의 명물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한참이 흐른 뒤다. 숙종 때 조정은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새로 부임하는 강원도관찰사가 반드시 장릉에 참배토록 했다. 원주에서 온 관찰사 일행이 주천강을 건너야 하는데 사인교나 말들이 일반 외섶다리로 건널 수 없었다. 주천 주민들이 다리를 붙여 쌍섶다리를 놓았고 관찰사 일행은 무사히 장릉에 참배할 수 있었다. 관찰사는 되돌아 가는 길 주천에 들러 쌍섶다리를 놓느라 수고한 백성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푹신한 쿠션이 느껴지는 쌍섶다리를 건너면 다음은 김종길가옥이다. 팔작지붕의 고풍스런 건물에 마당도 넓은 부잣집이다. 길을 안내한 주천 토박이 박상준씨는 "이런 큰 집들이 예전엔 무척 많았었다"고 했다. 강과 너른 들이 일군 풍요의 결과였다.
고택을 지나면 트레킹의 종점인 다하누촌 마당에 이른다. 쇠락해 가던 주천에 새로운 활력을 심어준 곳이다. 2007년 주천에 터를 잡은 다하누촌은 질 좋은 한우를 시중가의 절반 이하 싼 값에 사서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작은 주천마을에 다하누촌 한우를 파는 정육점이 10곳, 그 고기를 사가지고 상차림비(1인당 3,000원)를 내고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이 30곳에 이른다. 주말 저녁 망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전체에서 고기 굽는 연기가 가득 피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요즘 한우 값이 부쩍 올랐다고 하지만 다하누촌에서는 대도시 고깃집에서 먹는 값의 3분의 1 가격에 고급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암소 저온 숙성 전문인 다하누촌사거리점(033_372_2286)의 경우 1등급 이상 등심 150g이 1만875원, 안심 150g은 9,525원, 다하누모둠 300g은 1만4,000원이다.
주천 망산 트레킹 코스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영월= 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영월, 요선암·법흥사 전설도 있지요
주천에 왔다면 주천강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인 요선암과 요선정, 적멸보궁인 법흥사를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평창군과 횡성군의 경계에 있는 태기산(1261m)에서 발원한 주천강은 영월군 수주면과 주천면을 지난 뒤 신천리에서 평창강을 만나 서강이 된다. 이 서강이 영월읍에서 동강을 만나면 그때부터 남한강이다.
주천과 가까운 수주면에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경승지 요선정과 요선암이 있다.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 앞마당에서 돌계단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면 조각품처럼 기기묘묘한 형상의 거대한 암반지대를 만난다. 요강 같은 구멍이 난 바위, 사과를 깎듯 둥그렇게 돌려 깎여 나간 바위 등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듯한 암반이 펼쳐진다. 수많은 시간 물살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조선 중기의 명필 양사헌은 이곳 경치에 반해 ‘신선이 놀고 간 자리’라는 뜻의 요선암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륵암 뒤편으로 5분 가량 솔숲을 걸어 오르면 요선정이 나온다. 그리 크지 않은 정자 옆 커다란 바위에 몸통이 툭 튀어나온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감자바위 같은 느낌 이랄까. 정교하지 않지만 소박해서 더욱 정감이 가는 마애불이다. 마애불 바위를 돌아가면 깎아지른 벼랑 아래 굽이쳐 흐르는 주천강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려 뒤틀린 소나무가 강변 풍경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이다. 국내의 부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적멸보궁은 모두 5곳이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취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그리고 사자산 법흥사다. 사찰로 드는 길이 울창한 숲으로 이뤄져 분위기가 아늑하다.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이 없다. 대신 뒤쪽 풍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하나가 뚫려 있다. 유리창 너머로 사자산의 봉우리 3개가 보인다. 창에서 직선을 뻗으면 보이는 봉우리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고 한다.
법흥계곡은 유난히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곳. 최근 오토캠핑 붐에 힘입어 곳곳에 소나무 그늘을 한 오토캠핑장이 만들어졌다. 주말이면 텐트가 가득 계곡을 감싼다.
■ 여행수첩
주천엔 한우 말고도 토속의 강원 산골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우선 주천을 대표하는 토속 음식점으로 꼴두국수 덕분에 유명해진 신일식당(033_372_7743)이 있다. 메밀로 쫀득하게 빚어 낸 꼴두국수의 맛이 일품이다. 주인은 '어릴 적 하도 많이 먹어서 꼴두 보기 싫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국수"라 했다. 한그릇 4,500원.
주천묵집(033_372_3800)의 묵밥과 감자옹심이도 강원도의 맛을 선사하고, 인근 안흥찐빵이나 황둔찐빵 못지 않은 맛을 내는 주천찐빵(033_372_4936)도 들릴 만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만종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 후 신림IC에서 나온 뒤 주천으로 향한다.
영월= 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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