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힘은 사람을, 또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한 줄의 시가, 한 편의 연극이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새롭게 태어나게 할 수 있을까? 꽤 오랫동안 문학을 공부해 왔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예술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거나 가슴 벅차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 전에 본 연극이 그러했다.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군인 시라노는 사촌동생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외모가 추하여 감히 사랑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세상 일이 늘 그렇듯 록산느는 잘 생긴 크리스티앙을 좋아하고 시라노는 두 사람을 맺어주려 대신 편지를 써준다. 록산느는 그 편지를 보고 더욱 더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게 된다.
두 남자는 함께 전투에 나가는데 거기서도 시라노는 날마다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사랑의 편지를 보낸다. 결국 크리스티앙은 록산느가 진정 사랑한 이는 자신이 아니라 시라노가 쓴 편지 속의 주인공이었음을 깨닫는다. 절망한 크리스티앙은 다음 전투에 나가서 죽고 록산느는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15년 후 록산느가 시라노를 찾아와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건네자 시라노는 그것을 절절한 감정으로 읽는다. 시라노의 목소리와 모습에서 록산느는 자기의 사랑이 누구였는가를 마침내 깨닫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가 떠난 후 시라노는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를 연출가는 장인의 숨결을 불어넣어 감동적으로 무대에 되살려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평생 사랑을 가슴에 품고만 있었던 시라노는 죽지만 그의 영혼이 무대에 되살아난다. 하얀 국화꽃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걸어가는 그의 머리위로 꽃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조금씩 내리던 벚꽃 꽃잎은 점점 더 많아져 눈보라보다 더 강렬하게 무대 가득 쏟아진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꽃비를 맞으며 주인공은 천천히 퇴장한다.
제16회 베세토 연극제에 초청된 일본의 도가 스즈키 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시라노 드 벨쥬락> 의 마지막 장면이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만 주인공의 뒷모습은 쓸쓸하지 않다. 예술이 그를 축복해 주기 때문이다. 세속적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주인공의 마음은 마침내 사랑하는 여인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술은 더 나아가서 이승을 떠나는 주인공에게 폭포수 같은 꽃비를 내려주어 그의 삶이 결코 허망하지 않았음을, 그의 사랑이 결코 외롭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라노>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훈훈해진다. 주인공이 받은 보상이 마치 우리의 신산한 삶을 위로해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믿음을 새로이 얻고 극장을 나선다. 비현실적 예술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역설이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 즉 '실제적인 동물적 인간'과 '인간적인 인간'이 있다고 말한다. 동물적 인간이란 먹고 사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고, 인간적인 인간이란 "신성한 잉여로서의 아름다움"에 민감하거나 그 유혹에 빠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이란 원래 먹고 사는 것과 직접 연관이 없기에 잉여일수밖에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빛나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며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올 가을에는 가끔 인간적인 인간으로 돌아가 아름다움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말한 폴 발레리처럼 낙엽을 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김용민 연세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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