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출동! 화재출동! 중구 초동 62번지 화재발생!"
지난달 30일 오후 8시께 서울 중부소방서. 요란하게 울리는 출동 방송은 전시(戰時) 출격 명령처럼 다급했다. 순식간에 방수복을 차려 입고 차고로 뛰어가는 대원 10여명을 따라 뛰는데 벌써 숨이 헐떡였다. 채 1분도 안돼 대원들을 태운 지휘차, 구급차, 소방차가 꼬리를 물고 출동했다. 사이렌은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대고, 무전기는 쉴새 없이 '삐~빅' 거렸다.
출동 3분만에 도착한 중구 충무로의 한 주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신고를 한 주점 주인은 "누전 탓인지 주점 간판에 불이 났는데 소화기로 다 껐다"고 멋쩍게 말했다. 감식 대원이 손전등을 비춰 숨은 불씨가 없는지 살펴본 뒤 상황은 종료됐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또 다시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충무로 대한극장 맞은편. 이번에도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이 냄새로 더듬어 찾은 '화재 현장'은 충무로역 출구 앞 쓰레기통이었다.
담배꽁초가 문제였다. 한 대원이 2ℓ 생수통을 부어 진화했다. 지나가던 시민이 "물 한 바가지 끼얹으면 꺼질 것을 뭣 하러 신고까지 했는지"라면서 "수고가 많다"며 대원들을 격려했다. 안도감이랄까 허무함이랄까, 잔뜩 긴장됐던 근육이 탁 풀어졌다.
"이럴 땐 허탈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한 소방대원은 아무 표정 없이 "늘 있는 일인데요"라고 대꾸했다. 시민들의 신고정신이 너무 투철하다고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긴박한 출동 상황에서 바짝 언 사람은 기자만이 아니었다. 이날 현장에 함께 간 소방방재청 한경호(46) 기획조정관도 실은 첫 화재 현장 출동이었다. 20년 가까이 행정안전부 일반직 공무원으로 근무한 그는 올 2월 처음으로 소방방재청에 왔다.
그를 포함해 소방공무원 출신이 아닌 국장급 이상 간부 5명이 현장의 고충을 알기 위해 차례로 체험 근무에 나선 것. 그는 현장에서 돌아온 뒤 "대원들이 마치 전쟁하러 나가는 같아 솔직히 겁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양치기 소년'식 신고에 느슨해질 수도 있으련만, 베테랑 소방수인 장해권 소방장은 늘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화재 출동마다 대원들이 다치진 않을까, 출동 중 교통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을 달고 산다"고 말했다.
한밤중 스피커를 울리는 출동 명령. 한 시민이 동대문운동장역 5번 출구 앞에 쓰러져 있다는 신고였다. 대원들은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현장에는 노숙자 한 명이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술 냄새와 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대원들은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그를 겨우 설득해 인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겼다. 구급반장인 임희숙 소방장은 "하룻밤에도 서너 번씩 행려환자 신고를 받는다"며 "일반 병원에선 노숙자를 거의 받아주지 않고, 국립병원도 점점 꺼리는 분위기라서 병원 측과 다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소방서는 잠시 평온을 찾았다. 야식을 먹는 대원들 사이에서 한 대원이 보약을 데우고 있었다. 그는"몇 달 전 화재 현장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쓰러진 후유증 때문인지 몸이 안 좋다"고 말했다. 매년 서너 명의 순직자가 나오는 위험한 생활을 버티는 힘은 '자부심'이었다.
박수동 119안전센터장은 "예전엔 부상 위험이 높다고 소방관은 보험도 안 들어줬다"면서도 "밤낮없이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이가 소방공무원이란 자부심으로 산다"고 말했다. 최근 한 시사잡지가 시민 대상으로 벌인 공무원 신뢰도 조사에서도 소방관이 1위를 차지했다.
새벽 두 건의 '구급 출동'이 더 있고, 오전 7시30분께 근무조 교대가 이뤄졌다. 현장 체험을 마친 한 조정관은 "말로만 듣고 서류로만 보던 내용을 직접 경험해 보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며 "열악한 근무 여건에서 고생하는 대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정책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김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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