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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붕괴 20주년/ '철의 장막' 걷은 영광의 그 자리엔 또 다른 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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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붕괴 20주년/ '철의 장막' 걷은 영광의 그 자리엔 또 다른 벽이…

입력
2009.11.03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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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 바탕에 노란 별들이 원형으로 배치된 가운데 자리잡은 낫과 망치."

지난달 3일 유럽연합(EU)의 정치통합을 위한 리스본조약의 마지막 반대자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대통령이 프라하의 의회 앞에 모인 지지군중 사이를 지나는 사진 속에 깃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EU의 상징과 구소련의 상징을 함께 그려 넣은 푸른색 기.

EU통합 반대론자가 치켜든 이 깃발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를 기폭제로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20년이 흐른 현재 중ㆍ동부유럽의 처지를 함축하고 있다. '낫과 망치'의 억압체제를 벗어나 시장경제를 받아들였으나, 이들 지역에서는 지금 서유럽 강대국 주도의 국제분업체계 속 하청국가의 굴레에 빠져든 게 아니냐는 자기진단도 나오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중ㆍ동부 유럽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서부유럽을 지향하면서 통합 유럽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20년 동안 EU의 경제는 2배로 성장했고, 세계최대 경제블록이 됐다. 특히 장벽 붕괴 후 10여 년의 시장경제 도입기를 거친 후 2004년 중부유럽 주요국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이 EU에 가입하자 유럽통합은 완성단계에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이들 국가는 서유럽과의 경제 격차를 상당히 줄였다. 체코의 경우 동구권 붕괴 직전인 1997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EU 27개국 평균의 73%에 머물렀으나 지난해 80%까지 따라 잡았다. 같은 기간 슬로바키아는 51%에서 72%로, 폴란드는 47%에서 57%까지 쫓아왔다.

하지만 대가도 만만치 않다. 20년간 이들 국가에서 계층간 소득불평등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지속적으로 악화해왔다. 지난해 불어 닥친 금융위기로 이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향후 그 대가로 각종 복지예산을 줄여야 할 처지여서 상황은 더 악화될 전망이다.

20년이 흐른 후에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2등 시민'이란 자괴감도 극복해야 할 숙제다. 통독 이후 정부가 19년간 무려 1조2,000억유로(약 2,100조원)를 투자해 다른 동구 국가에 비해 훨씬 형편이 나은 구 동독지역 역시 마찬가지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현재 구 동독지역의 전체 독일 GDP 기여도는 10%에 머물고 있다. 만성적으로 높은 실업률도 나아지지 않아 통일 후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한 구 동독주민은 200만명에 달한다. 최근 독일의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는 2등 시민"이라고 답한 구 동독 주민이 전체의 3분의 2에 이르는 것도 동독인의 자괴감을 보여준다.

이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 20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는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역사적 대전환점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독일 녹색당 지도자이자 독일 외무장관을 역임한 요시카 피셔는 2일 오스트리아 언론 기고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동구를 억압했던 소련이라는 슈퍼파워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됐다"면서 "이후 유일 슈퍼파워였던 미국 역시 9ㆍ11 사태 이후 독선적 외교와 최근 경제위기로 과거의 지위를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장벽 붕괴 이후를 '슈퍼파워 쇠락의 역사'로 본 것이다. 이어 피셔는 "과거 20년 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현재 지구는 '생태학적 한계라는 장벽'에 부닥쳤기 때문에 향후 20년은 이 새로운 장벽을 부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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