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몰래 훔쳐 쓴 전기료를 이제야 납부합니다. 죄송합니다."
최근 한국전력 안양지점에 이런 내용의 편지 한 통과 함께 20만원권 우편환이 배달됐다. 편지를 쓴 이는 경기 안양시에 사는 임칠호(67)씨. 그는 "지긋한 나이에 70년 인생을 되돌아 보는 중, 한국 전력에 갚을 것이 있어 이렇게 편지와 작은 돈을 보냅니다"라고 썼다.
임씨의 사연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공부해야 한다는 굳은 각오로 고향인 충남 대천에서 서울로 유학 와 동양공고를 다녔다. 학교 인근인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생활비와 용돈을 벌어 쓰기 위해 하루 2~3시간씩 동네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과외는 대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고교생인데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좋아 '소문난 과외 교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임씨가 세 들어 사는 집 주인이 역시 어려운 형편 탓에 수개월 동안 전기료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집 전체가 단전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싶다고 찾아오는데 방안은 캄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습니다."
다른 집 전선에 몰래 줄을 연결해 전기를 끌어다 30w짜리 전구에 불을 밝히고 두 달 가량 사용한 것. 그는 "도둑 전기를 쓰면서도 너무나 미안해 아이들 가르치는 2~3시간 정도 외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임씨는 공고를 졸업한 뒤 명지대에 진학해 윤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땄고, 서일대 등에서 윤리학 강사로 일했다. "윤리학을 공부한 '도덕 교사'가 한때나마 '도둑 전기'를 썼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결국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간 일을 스스로 들추어 '51년 밀린' 전기료를 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한전 측은 임씨가 보낸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전기료 채권은 이미 소멸시효(10년)가 지났기 때문이다. 한전 측은 이런 사정을 임씨에게 설명하고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전은 고심 끝에 임씨의 동의를 얻어 이 돈을 안양의 한 보육원에 기부했다. 그는 "한전 측이 전기료로 받아줬으면 좋았겠지만 보육원 어린이들을 위해 더 좋은 곳에 사용한다고 해 흔쾌히 허락했다"며 활짝 웃었다.
임씨는 현재 의왕시에서 작은 재활의학 전문 병원을 운영하는 딸과 함께 장애인을 위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주형 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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