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 (CLG)를 들추기 시작하다 이야기가 번역 쪽으로 번지며 기다란 에움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해지면 그 실재를 아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칸트의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은 처진데, 그 이름을 하도 거듭 듣다 보니 칸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CLG도 독자들에게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CLG라는 책이 그간 너무 자주 거론됐으니까요. 일반언어학강의>
실상 우리가 CLG에 관해 얘기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 곧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포놀로지 따위의 개념을 훑고 그 말들을 예로 들어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살핀 것뿐이지요. 이대로 CLG를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 CLG 얘기를 더 하려 합니다.
맨 첫날, CLG의 지성사적 의의는 언어를 하나의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시동을 건 데 있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세요? 또 거기서 구조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를 뜻한다는 말씀도 드렸죠? 그렇지만 이 정도 가지곤, 언어가 구조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잡히지 않을 듯합니다. 게다가 이미 말씀드렸듯, 소쉬르가 CLG에서 '언어는 구조다'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요. 소쉬르의 후배 언어학자들, 그리고 인접과학 연구자들은 CLG의 어떤 대목에 홀려 그 책을 구조주의의 수원지로 여겼을까요? 이 책을 내처 들춰봅시다.
CLG 중간쯤에서,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머리의 앞면을 표현하려고 한국인들은 [ㅓ] [ㄹ] [ㄱ] [ㅜ] [ㄹ]이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얼굴'의 'ㅇ'이 소릿값 없는 장식품인 건 아시죠?) 그러나 소쉬르에 따르면 이것 자체는 언어가 아닙니다. 똑같은 목적으로 영국인들은 [f] [ei] [s]라는, 전혀 다른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언어는 그런 음향적 실체가 아니라, {얼굴}이나 {face}라는 기호들의 가치들로 이뤄진 체계입니다. 그것은 규칙의 세계 곧 형식의 세계입니다.
{얼굴}이라는 기호의 가치는 예컨대 이 기호가 {낯}이라는 기호와 맺는 관계, 정확히는 차이나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국어 '얼굴'과 '낯'의 가치는 다릅니다. "볼 낯이 없다"라는 숙어에서 '낯'을 '얼굴'로 바꾸면 자연스러움이 덜합니다. 만약에 한국어 어휘목록에서 '낯'이 사라진다면, '얼굴'이 '낯'의 가치를 남김없이 빨아들일 겁니다. 그 땐 "볼 얼굴이 없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일 테지요.
또 한국어에서 /t/와 /th/와 /t'/는 서로 대립하며 제 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달(月)'과 '탈(假面)'과 '딸(女息)'에서처럼 말이죠. 그래서 한국어에선 이 세 소리들이, 서로 다른, 다시 말해 대립하는 음소들을 이룹니다.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style'의 둘째 자음을 /t/로 소리내든 /th/로 소리내든 /t'/로 소리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론 /t'/로 내는 것이 표준발음에 가깝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t/와 /th/와 /t'/가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음소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 소리들의 실체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여기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대립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이것이 대략 소쉬르의 설명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체스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만 가치가 생산되고(그것이 소쉬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가치들의 집합,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곧 형식이고 체계이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할 때의 '언어'가 일상용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소쉬르 특유의 '언어', 곧 '파롤'과 대립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해, 소쉬르의 저 유명한 선언을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인 '파롤'은 다분히 실체일 수밖에 없지요.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 소쉬르는 또 '제네바발-파리행 열차'를 끌어대기도 합니다. 24시간 간격으로 떠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 두 대를 우리는 '같은' 기차라고 말합니다. 승무원들이나 객차가, 다시 말해 그 실체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것을 '같은' 기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발차시각이나 운행노선 등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운행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들은 모두 동일한 랑그인 것입니다.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체스놀이나 제네바발-파리행 급행열차의 비유가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심지어는 랑그가 과연 형식이기만 할 뿐인가에 대해서도 반론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는 앙드레 마르티네라는 프랑스인 언어학자가 거론한 영어 /h/ 소리와 /ng/ 소리의 예입니다.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별개의(그러니까 서로 다른) 음소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영어라는 '랑그' 체계 안에서 /h/ 소리와 /ng/ 소리가 대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 두 소리를 서로 교체해서 달라지는 단어쌍이 영어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h/ 소리와 /ng/ 소리는 다릅니다. '대립하지 않는데도' 다릅니다. 이 두 소리는 영어에서 서로 다른 음성(파롤)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음소(랑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어라는 랑그 안에서 '대립하지 않는' /h/와 /ng/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소리의 '실체'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일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결국 랑그는 때로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르티네의 반례가 "랑그는 형식"이라는 소쉬르의 정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겁니다. 모든 규칙이 지니게 마련인 예외 정도로 넘깁시다. 랑그가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비유들은 '구조'(소쉬르의 용어로는 '체계')라는 것의 개념을 제 나름대로 명료히 드러냅니다.
CLG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러 거론은 하겠지만, 이 책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어학 개론서로서 CLG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낡은 책이고,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담은 위태로운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고전이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CLG를 통해, 당대 언어학의 주류였고 그 자신 깊이 개입했던 비교문법과 결별함으로써, 언어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여러분도 짬을 내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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