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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지키려다" 킬번씨 가족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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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지키려다" 킬번씨 가족의 비극

입력
2009.11.0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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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3년 전 사고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고 희귀병까지 얻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한옥과 한국문화를 사랑했던 남편의 억울함을 꼭 생전에 풀어주고 싶어요."

'외국인 한옥 지킴이', '한옥보존 투사'로 잘 알려진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66)씨의 부인 최금옥(55)씨가 털어놓은 얘기는 이들 부부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 어쩌면 우리 문화의 '보존과 개발' 사이에 놓인 비극일지 모른다.

900채가 넘는 한옥이 남아있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재동, 계동, 삼청동 일대 '북촌 한옥마을' 중 으뜸은 가회동 31번지. 킬번 부부가 몇 년 전까지 한옥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평화롭게 살아 가던 곳도 바로 이곳 가회동 31-79번지다. 1988년 이곳에 들어온 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였던 남편은 '전통한옥 지킴이'로서 꾸준한 활동을 벌였다.

지난 17일 자택에서 만난 최씨는 "당시 모두가 기피하던 한옥이었지만, 첫눈에 반해 들어왔다"며 "남편은 이 집 구석 구석을 전통 형식으로 가꾸면서 누구보다 한옥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4년 서울시가 북촌 한옥 가꾸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의 삶에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울시 사업에 따라 한옥 개ㆍ보수시 수천만원의 지원금이 나오면서 한옥마을에도 개발 투기 바람이 불어닥쳤던 것.

2004년부터 속속 이사해온 이웃 주민들이 각종 보수 공사를 벌이면서 소음과 먼지에 시달렸던 부부는 급기야 2006년 2월 사고까지 당했다. 바로 옆집에서 허가받지 않은 포크레인이 들어와 땅을 파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킬번씨 집까지 일부 훼손돼 킬번씨가 이를 동영상으로 촬영하다가 시공사 직원에 떠밀려 넘어졌다는 것이다.

최씨는 "당시에는 큰 증세가 없어 넘어갔지만 수개월 후 사고의 후유증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남편은 29살 때 자동차 사고로 목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장애자가 됐는데 2006년 사고를 당한 후 후유증으로 시신경과 안구근육까지 손상을 입어 시력을 잃고 말았어요. 이후 피가 몸 구석구석 잘 돌지 않는 희귀병까지 얻어 두발이 조금씩 썩어가고 있어요."

비극은 킬번씨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공사가 끊이지 않다 보니 소음과 각종 화학물질 등으로 친정 어머니가 몸이 많이 상하셨어요. 부동산에선 집을 팔라고 자꾸 찾아와 압박했고, 우리에게 불만을 품은 어떤 이웃은 집 앞에 오물을 놓고 가기도 했어요. 일종의 집단 따돌림인 거죠. 그 때문인지 어머니는 지병이 악화돼 지난해 7월 결국 돌아가셨어요."

이런 불행 속에서 최씨도 온전치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그러다 한달 만에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에서 자궁암에 걸렸다더군요." 다행히 암을 초기에 발견한 최씨는 지난해 10월 수술을 받았다.

최씨는 북촌 마을에서 진행된 한옥 개ㆍ보수 공사에 대해 "대부분이 겉 모양만 한옥인 것처럼 꾸미지만 실제는 한옥을 망친 공사"라며 "아름다웠던 북촌도 망가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2006년 킬번씨가 사고를 당했던 사건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옆집이 한옥신축공사를 하면서 킬번씨 소유지를 훼손한 것에 대한 민사소송이다. 1, 2심에선 패했지만 대법원 판결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대법원 항소를 무료로 수임키로 한 최재천 변호사는 "재판 형식은 민사재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한옥을 지키기 위한 공익재판"이라며 "지금까지는 최씨 혼자 소송을 진행해 패했지만, 대법원에선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한국에서 당한 끔찍한 일 때문에 남편은 한국에 다시 오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그의 생전에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 데이비드씨는 현재 치료차 일본에 머물고 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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