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대부분의 패션쇼는 서울에 있는 특급 호텔에서 열렸다. 지금의 코엑스나 서울무역전시장처럼 특별한 행사를 위한 장소가 따로 있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갤러리, 클럽 등 다양한 곳에서 패션쇼를 열 수 있게 되면서 디자이너들은 더 자유롭게 자신에 맞게 쇼를 연출할 수 있다.
21일 서울 리츠칼튼 호텔의 에덴 클럽에서 패션쇼를 가졌다. 올해 처음 서울에서 가진 정규 컬렉션이었다. 장소를 굳이 클럽으로 선택한 이유는 쇼가 끝난 후 파티도 함께하면서 손님들과 흥겨운 시간들을 갖기 위해서였다. 쇼가 끝난 뒤 파티를 갖는 것은 외국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내게 있어 클럽 패션쇼는 25년만의 일로 감회가 새로웠다.
첫 번째 클럽 패션쇼는 25년 전인 1985년 2월에 가졌다. 당시 나는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한지 2년째인 신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옷들을 끌어다가 즉흥적으로 벌인 쇼 겸 파티였다. 당시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윤문, 전혜라 등 당시 신인 모델들의 도움으로 쇼를 했다.
장소는 서울 조선호텔의 한 맴버십 클럽이었다.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한 패션쇼였는데, 발렌타인데이가 당시 생소했던 터라 객석은 대부분 외국인 차지였다.
당시 국내 패션쇼를 되짚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지금은 봄ㆍ여름과 가을ㆍ겨울로 나뉘어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인 컬렉션이 열리지만 당시는 컬렉션이 1년에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여러 디자이너가 함께 하는 그룹 패션쇼만 열렸다.
그 중 가장 공신력 있는 대표적인 컬렉션은 미국 코튼협회에서 주관해 매년 열렸던 코튼쇼였다. 다음으로는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중앙디자인그룹(JDG)이 이끌었던 중앙디자인 컬렉션을 들 수 있다. 디자이너 한 사람당 12~15벌의 의상을 선보이는 일종의 그룹 패션쇼였다.
이후 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SFAA)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정기적인 패션쇼가 정착하게 되었다. 연간 두 차례의 정기 패션쇼를 통해 국내 패션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돌이켜 보면 SFAA가 활동을 시작한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중앙디자인 콘테스트는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이들의 오랜 노고가 지금 우리 패션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기반이다.
이번 서울 클럽 패션쇼는 파리 컬렉션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단 열흘 만에 치른 만큼 매일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파리 컬렉션 후 현지 프레스와 바이어를 위해 그 옷들은 남겨두었기 때문에 이번 쇼를 위해서 똑같은 옷들을 다시 한 번 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조각가 박승모씨와 어시스턴트들에게 감사 드린다.
가수 리안나의 앨범과 뮤직 비디오 촬영을 위해 미국 뉴욕에 보냈던 옷도 똑같이 다시 한번 더 만들었다. 미국 뉴욕에 보낸 옷을 이번 쇼가 열리기 전까지 돌려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수 리안나는 요즘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여자 친구로 더 유명하다.
지난번 서울역 패션쇼에서 같이 작업한 최종범씨도 참여해 쇼의 오프닝을 맡아 주었다. 그간 최종범씨와의 영상작업은 장소와 자금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하지 못했다. 이번 서울 쇼에서는 벼르고 별러 다시 시도하게 되었다.
오프닝 영상에 이어 5명으로 구성된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파리에서는 의상을 제외한 많은 연출 시안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파리에서보다는 서울 쇼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실감하게 된다.
컬렉션 테마로 사용된 인간과 교감하는 황량한 우주, 영화 '듄(Dune)'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성된 이들의 영상과 퍼포먼스 작업은 쇼를 위한 충분한 전주곡이 되었다. 역시 파리에서 아쉬움이 컸던 메이크업에도 변화를 시도했고, 모델에 붙이려고 제작한 은빛 뿔은 즉흥적으로 내 이마에 붙이게 해 파티에 흥을 돋우었다.
여기에는 나 또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파티에 동참하는 한 사람으로서 같이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헤어와 메이크업은 김정한씨와 이선주씨가 담당했고 진행을 위한 사회는 두터운 친분의 홍록기씨가 맡았다.
영상과 퍼포먼스 그리고 이어진 패션쇼 무대. 시간이 모자라 리허설도 충분히 못했지만 다들 프로들이라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무대 인사를 위한 피날레는 가수 인순이의 열정적인 라이브로 진행됐다. 인순이씨의 폭발적인 피날레 라이브 무대는 곧 이어질 파티의 흥을 한껏 북돋아 주었다.
쇼 전날 매장을 직접 찾은 인순이씨와 나는 거의 자정까지 쇼와 파티가 잘 어우러지는 컨셉을 논의하며 즉흥적인 콘티를 잡았다. 경험이 풍부한 '국민 디바'답게 단 한 번의 리허설 후 무대에 올라 폭발적인 가창력과 즉흥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노래 할 때 즉석에서 무대로 나온 이민우씨와 홍석천씨의 댄스도 현장의 흥을 돋우는데 한 몫을 했다.
지금 우리 회사에는 20년이 넘게 근무하는 직원들이 여럿 있지만 그간 이들과 변변한 회식 한번 못했다. 그런데 이번 쇼를 하면서 회식을 했다. 이들을 처음 만났던 신인 디자이너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모든 디자이너들과 난장 같은 파티를 가졌더니 그간 미안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된 기분이다. 이 자리를 빌어 참석해주신 여러 패션 피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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