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경제학 교수가 되고 싶어 했고 줄곧 후진국 경제발전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온 내가 학술연수생으로 선발되어 이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1년에 들어서서 나는 본격적인 유학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몇몇 대학을 골라 입학원서를 보내고 은행 일이 끝나면 영어학원에 나가 회화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 무렵 나는 당시 남덕우 재무장관을 도와 드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행에서 일하면서 남 장관의 지시에 따라 자료를 찾아 드리고 정책안이 나왔을 때 이에 대해 검토해 보고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정책보좌관의 역할이라 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1970년 가을부터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난 1971년 말까지 했는데 남 장관이 그러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김성환 당시 한은 총재에게 부탁했고 김 총재가 나를 추천했던 것이다.
남 장관을 도와드리는 일은 내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 때 내가 남 장관을 위해 한 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일로는 사채(私債) 동결 문제가 있다. 71년 가을 쯤으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불러서 갔더니 사채를 동결한 외국의 사례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만일 사채를 동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조사해 달라고 하면서 이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정책연구이니 절대 극비로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회주의 혁명기가 아니고는 사례가 없고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조치는 시장경제를 마비시켜 정책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 뒤 내가 미국유학을 떠나면서 인사를 드렸더니 금일봉을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내가 미국에서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던 72년 8월3일에 한국에서 사채 동결 조치가 단행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그 때 일이 떠올랐다.
드디어 세 개 대학에서 입학허가가 왔는데 그 중 뉴욕주의 수도 알바니(Albany)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 경제학부에 가기로 했다. 거기서만 첫 학기부터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알바니는 뉴욕시에서 허드슨강을 따라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세 시간쯤 가서 있는 인구 5만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뉴욕에서 허드슨강을 따라가는 기차 길은 특히 가을 경관이 절경이며 알바니는 겨울에 눈 많이 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온 가족을 남겨두고 71년 크리스마스에 서울을 떠나 72년 1월15일부터 첫 학기 수업을 시작했다. 이 때 나는 서른여섯, 1남3녀를 두고 있었다. 막내아들 준(浚)은 그 때 태중이었는데 나는 모르고 떠났으며 그 후 미국 기숙사에서 전보를 받고 그의 출산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시 77세의 어머니였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를 두고 떠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나는 어머니 돌아가실 경우의 자금조달, 장의사와 장의절차, 부고할 주소록 등 계획서를 만들어 아내에게 맡겼다. 결국 아내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모두 떠맡을 수밖에 없었으며 어려움을 이기고 그 일을 잘 해냈다.
석사 학위를 하도록 2년이라는 기간이 주어졌지만 가능하면 박사학위를 위한 필기시험만이라도 합격해 귀국하고 박사학위 논문은 서울에서 마무리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갔다.
현지에 가서 보니 경제학과에 이봉석 교수(올해 작고) 경영학과에 이학종 교수(연세대 교수)가 있었고 학생으로는 곽상경(고대 교수) 이정인(범양사 사장) 정구현(연세대 교수) 홍승수(서울대 천문학교수) 등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첫 학기에 나는 크게 고전했다. 우선 영어가 모자라 강의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공고 출신이어서 원래 영어 실력이 부족한데 교수들도 외국인이 많아 더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도 수리를 많이 쓰는 경제학은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경제사상사를 가르친 마이클 노박(M. Novakㆍ한국에도 온 일이 있음) 교수는 칠판도 거의 쓰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아 말로만 강의를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책을 읽고 독학해서 따라가야 했다.
또 대학 졸업 후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다가 학생으로 돌아가 보니 머리에 녹이 슨 것 같아 기억력 좋은 이십대의 젊은 학생들 틈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대학 다닐 때 배운 경제학이 별 도움이 안 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듯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더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 때 나는 공부하는 것이 마치 망치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 일이 있다.
그 때 내가 지낸 기숙사는 학교에서 시내 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있어서 학교는 늘 셔틀버스로 다녔다. 다른 학생들은 대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나는 혼자 공부해야 하는 습성이 있어 기숙사 독방에서 공부했다.
내 방에는 맥주나 양주가 있고 아내가 보내준 마른안주가 있었는데 밤 열두시가 되면 한국학생들이 찾아와 술을 나누어 마시고 라면도 끓여 먹었다.
서울에 전화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요금도 비싸 일 년에 한 두 번 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할 때는 온 식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언제 몇 시에 전화한다는 것을 미리 편지로 알려 놓고 전화를 했다. 마침 한은에 같이 다닌 손위 동서 조경호 씨가 뉴욕사무소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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