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예정지인 서울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옥상에 형광색의 플라스틱 소쿠리 수만개가 줄줄이 사탕처럼 엮인 채 자리를 잡았다. 설치 과정 중 '도대체 뭐하는 거냐'는 청와대의 문의까지 들어오게 만든 이 소쿠리들의 정체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전시 '신호탄'에 출품된 최정화씨의 작품 '총, 균, 쇠 2009'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기무사 공간이 우리의 것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예고하는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의욕적으로 준비한 이번 전시는 김창렬, 박서보 등 원로 작가부터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까지 58명의 작품 300여점으로 이뤄졌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활용한 '미술관 프로젝트', 최정화씨의 작품처럼 기무사 공간을 변형시키는 '공간변형 프로젝트', 그리고 기무사라는 공간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이다.
전시를 여는 것은 서용선씨의 설치작 '감시'이다. 기무사 본관 현관 양쪽에 설치된 철망 안에서 총을 든 군인들이 관람객을 지켜보고 있다. 그 오싹한 느낌은 얼마 가지 않아 유쾌함으로 바뀐다. 임옥상씨의 작품 '놀다가세요'는 수송부 건물의 벽을 허물어 내부를 훤히 드러나게 만든 뒤 온통 분홍색으로 칠해놓았다. 분홍색 건물에는 'POLICE'대신 'FELICE'(이탈리아어로 행복이라는 뜻)라고 적힌 전경 방패가 빽빽하게 붙어있다. 이용백씨는 강당에 현란한 꽃무늬가 그려진 군복 100벌을 걸어놓았다. 22일 열린 개막식 때는 꽃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꽃 속을 걸어가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군복 명찰에는 백남준, 앤디 워홀 등 유명 예술인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정해진 번호로 전화를 걸면 그들의 메시지도 들을 수 있다.
기무사 건물과 그 속에 남은 흔적들도 작품의 소재가 됐다. 건축가 서승모씨는 본관 일부 공간의 마감재를 뜯어내고 건축 재료와 공법 등을 겉으로 노출시켰다. 1929년 처음 지어진 부분, 후에 증축한 부분 등 건축물 속의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그 공간에는 인공의 철과 자연의 돌로 이뤄진 이우환씨의 조각 '관계'가 놓여 명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박용석씨는 기무사 건물에서 모은 폐형광등 300개를 수리해 지하방의 바닥에 줄지어 세웠다. 다시 환하게 불을 밝힌 형광등은 미술관으로의 출발을 의미한다. 황혜선씨는 불투명한 창문 유리에 구멍을 뚫고 작은 글씨를 새겨 외부의 빛과 공기가 새어들도록 했고, 최우람씨는 어두운 복도 천장에 기무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가상의 기계 생명체들을 매달았다. 윤석남씨는 계단 밑 구석진 공간에 버려진 개들을 형상화한 조각을 풀어놓았다.
이번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게는 신호탄이겠만, 솔직히 관객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7월 말에 이미 대학생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아트페어가 이곳에서 열렸고, 민간 기획사가 개최한 국제미술행사 '플랫폼 인 기무사'가 최근까지 이어져 기무사 공간에 대한 호기심은 상당 부분 해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비워두지 말고 의미있는 행사에 사용하도록 한다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방침이 낳은 결과인데, 덕분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는 환하게 밝은 대낮에 신호탄을 쏘아올린 셈이 되고 말았다.
전시를 기획한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플랫폼 인 기무사' 전이 과거를 털어내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 전시는 이 공간의 새 출발을 알리고 비전을 제시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고 두 전시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무료로 열린다.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은 "11월에 서울관의 설계 공모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나, 아직 기무사 터에 남아있는 국군서울병원의 이전 여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02)2188-6000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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