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하철을 타고 오가다 보면 희한한 풍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서울 을지로입구역(2호선) 롯데백화점 지하매장과 연결되는 계단 참에 '김창숙 부띠끄 70~90% 할인'이라고 크게 써붙인 매장이 들어섰는가 싶더니 최근엔 그 매장이'엘라호야 by 변정수'로 바뀌어서 행인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지하철 라인이 여럿 겹치는 구간의 이동 통로에는 '이신우 창고세일'이라고 붙인 매장들이 성업중이다. 옷을 구입하거나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장년 여성들이다.
이달 초 서울에서도 강남과 압구정동, 명동 등 딱 3곳 매장에서만 한정판매된 일본 캐주얼브랜드 유니클로의 '플러스 제이'(+J) 라인. 1980~90년대 미니멀리즘 트렌드를 주도했던 유명 디자이너 질 샌더가 유니클로를 위해 특별 디자인한 콜래보레이션 제품으로 3일만에 일부 제품이 매진되며 7억5,000여만원의 엄청난 매출을 기록했다.
국내 브랜드중 한달 매출이 1억원을 넘는 매장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단순 비교를 하기엔 '체급'이 다르지만 이들 브랜드는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한때 탄탄대로를 걸었으나 지금은 잊혀진 브랜드들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이신우 김창숙은 당시 일본 오사카와 도쿄컬렉션에 초청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엘라호야 by 변정수는 모델출신 탤런트의 이름값에 기대 홈쇼핑 인기 브랜드로 날렸지만 모두 부도가 났거나 부도 직전 상태로 영업이 지지부진하다.
질 샌더라고 다르진 않다. 한때 세계 패션계를 주도했으나 프라다그룹에 팔린 뒤 브랜드 전개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 디자이너가 이탈하면서 지금은 브랜드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 비슷한 전철을 밟았음에도 현실의 위상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은 왜일까. 김창숙 이신우에게는 구원투수가 없었지만 디자이너 질 샌더에겐 유니클로라는 구원투수가 있었다는 것 아닐까.
최근 만난 지식경제부 주력산업정책관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성장하려면 필히 자본에 태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자본력이 브랜드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디자이너와 자본과 경영능력을 갖춘 기업이 만나야 비로소 영속성과 시장성을 갖춘 브랜드가 탄생한다.
지난 9일 파산신청을 했던 일본의 고가 디자이너 브랜드 '요지 야마모토'가 극적인 회생 절차에 들어간 것도 일본의 사모펀드가 자금지원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은'이신우' '김창숙' 등 지하철 브랜드의 난립이 비록 중장년층의 향수에 기댈지언정 한번 일군 브랜드 파워는 상당기간 힘을 발휘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다는 점이다. 패션기업과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생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면 싶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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