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관 A씨는 지난 6월 말 "카드 사용액이 200만원 연체됐다"는 독촉 전화를 받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해당 카드회사 신용카드를 발급한 사실도 없었던 A씨가 어리둥절해하자, 전화 속 카드사 직원은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다. 관계 당국에 알리겠다"고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경찰, 금융감독원 직원이라는 이들의 전화가 잇따랐다.
누군가 A씨의 정보를 훔쳤기 때문에 은행계좌에 보호조치를 해야 한다며 보호계좌번호와 보안번호를 누르도록 했다. 전형적인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수법이었다. 숨돌릴 틈 없는 전화 공세에 당황한 A씨는 이를 의심할 겨를도 없이 상대방이 불러주는 번호를 눌렀고, 결국 범인들의 대포통장계좌로 3,000만원을 이체하고 말았다.
각 기관 직원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수법이 국내에 알려진 지 수년이 흘렀지만, 속절없이 당하는 피해자들이 줄지 않고 있다. 이들 중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비롯해 대학교수, 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적지 않다.
지난달 중순 수도권 대학의 B(58) 교수는 다짜고짜 '○○○ 아버지냐'는 전화를 받고 넋이 나갔다. '감옥에서 갓 나온 사람'이라는 남성은 "피투성이가 된 당신 아들이 지하실에 갇혀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범인이 가족 신상을 훤히 꿰뚫고 있는 데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 살려주세요!"라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틀림없는 아들 목소리 같았다. "전화를 끊으면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B교수는 곧장 은행으로 달려가 현금 700만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당시 아들은 직장에서 태연히 근무하고 있었다.
이 역시 납치를 가장한 전통적인 보이스피싱 수법. 다행히 B교수가 경비원에게 쪽지로 상황을 알린 덕에 경찰이 신속히 통장 모집책을 검거해 돈을 찾게 됐다. B교수는 "워낙 당황해서 살려달라는 목소리가 진짜 아들 같았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의사 C(48)씨도 최근 우체국 직원을 사칭한 사기 전화에 당했다. 신용카드가 반송돼 왔다는 전화에 "신용카드를 신청한 사실조차 없다"고 하자 A비서관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됐다.
개인정보가 유출돼 계좌보호가 필요하다는 것. C씨도 결국 2,300만원을 날렸다. 경찰 관계자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며 "대학 교수, 학교 교장, 중ㆍ고교 교사, 의사, 방송국 PD 등 다양한 전문직 종사자들의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 신고건수는 5,826건, 피해액은 530억원으로 2007년 한해 신고건수(3,981건)와 피해액(434억원)를 이미 넘었다. 지난해(8450건ㆍ877억원)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올해도 여전히 하루 약 23건의 신고가 접수되고 2억여원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피해가 줄지 않는 데다 사회 고위층 인사들까지 감쪽같이 속는 것은 왜일까.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보이스피싱은 급박한 위기상황을 조성해 즉각적 대응을 요구한다"며 "감정적으로 불안과 긴장감을 고양시키면 대뇌기능이 약화돼 합리적 사고를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평소 보이스피싱 수법을 알고 있더라도 갑작스런 상황을 만나 당황하게 되면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표 교수는 "사기범이 아무리 몰아치더라도 즉각 대응해선 안 된다"며 "당황했을 땐 합리적 사고 능력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한 숨 돌리고 혼자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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