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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테하차피의 달' 잊고 싶은 기억도 되새김질해야 하는…산자의 숙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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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테하차피의 달' 잊고 싶은 기억도 되새김질해야 하는…산자의 숙명이여

입력
2009.10.2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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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상 지음산지니 발행ㆍ260쪽ㆍ1만원

"아름다운 기억이야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이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 역시 되살려야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제의 형식이건, 조문 형식이건 죽은 이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현재의 내 삶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죽은 이들의 존재에 대한 추념에서 해답이 구해지곤 한다. 그 해답 찾기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워가기도 한다.

조갑상(60)씨의 세번째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 의 인물들은 누군가에 가위눌려있다. 그들의 삶을 옥죄어오는 것은 죽은 자들이다. 기억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망자와의 정직한 대면 없이는 삶과의 화해도 불가능하다.

수록작 '아내를 두고'의 화자는 죽은 아내를 회상하는 노년의 사내다. 정년퇴직 후 아내와 함께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평탄한 노후를 준비하던 사내. "지금까지 살아오던 테두리 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리고 벗어날 것도 없이 살아가게 되어있구나"라고 안심하던 사내의 삶은, 그러나 출가한 고명딸의 미국 이민이라는 사건으로 균열이 생긴다. 아내는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기독교에 입교하고,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아내를 무연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뿐이다.

상대의 종교에 대해 간섭하지 않기로 했던 묵약이 서서히 깨지면서 그들의 관계는 위기 국면으로 치닫고, 밤길 운전에 나섰던 아내의 갑작스런 사고사로 파국을 맞는다. "아내는 그 순간에도 내 신앙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며 회한과 자책감에 젖어 아내의 무덤가에서 사내가 흘리는 한 줄기 눈물은, 망자와의 화해의 몸짓이자 남겨진 자의 살아가기 위한 근거가 된다.

'아내를 두고'에서 화자와 망자를 화해시켜주는 매개가 투명한 눈물이라면, 다른 작품들에서 그 매개는 '이야기'다. 친구의 모친상을 찾았다가 우연히 대학시절 연인의 부음을 듣는 고가구점 주인('통문당'), 대학시절 사랑했던 여자가 죽자 문상하러 갔다가 영안실로 가지 않고 깊은 산사를 찾는 사내('겨울 오어사')들에게 그렇다.

이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가슴에 차오르던 아픔이 물처럼 공기처럼 다시 몸속에서 일렁거'리거나, '갑자기 엄청난 높이의 바위 위에 코를 박고 선' 것 같은 통입골수(痛入骨髓)의 고통에 시달리지만 각각 고구가점의 단골손님과 우연히 절길에 동행하게 된 사내에게 자신의 아픈 사연을 털어놓음으로서 마음의 매듭을 푼다.

다른 수록작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기제사를 둘러싼 자녀들의 갈등이 소재다. "애써 덮어둘 필요도 없지 않나"라며 할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자녀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동생과 "우리한테도 불편한 과거를 애들한테까지 물려주어야 하는가"라며 이를 묻혀두자는 형의 팽팽한 긴장은, 산 자와 연결돼있는 죽은 자들의 존재감이라는 이 소설집의 중심 주제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다.

1980년 등단, 현재 부산 경성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부산 작가' 조씨가 11년 만에 낸 소설집이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처럼 놀랍지도 기발하지도 긴박하지도 않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연륜에서 우러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 안정된 이야기 구조, 먹빛처럼 차분한 문장은 작가의 오랜 침묵을 보상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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