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노벨문학상 선정 시기가 되면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관해 이런저런 논의가 무성하다. 한국문학의 번역 문제도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이와 관련해 스위스 태생의 번역가 율리아 타르디 마르쿠스(1905-2002)를 떠올린다. 그녀는 독일인 부모 아래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스위스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사용했다.
번역에 모국어 능력이 핵심
중국 일본 등과의 제한된 교류 말고는 사실상 섬나라처럼 고립되어 살았던 우리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지리적 특성상 이중 언어 사용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율리아처럼 독일인 부모 아래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생활했다면, 우리 눈에는 그야말로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모국어는 독일어 하나뿐이라고 단언한다.
28세 되던 1933년부터 60년이 넘도록(1995년 현재) 프랑스에 살았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프랑스어에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해도, 독일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미묘한 뉘앙스를 옮겨야 하는 문학작품의 경우는 어림도 없다고 한다. 모국어는 인간 영혼의 뿌리에 맞닿아 있는 것일까. 완벽한 이중 언어 사용자처럼 보이는 그녀에게도 '모국어'는 단 하나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스위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독일어 프랑스어의 이중 언어 사용자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중 언어 사용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귀착되는 언어는 그 중의 어느 한쪽 언어일 것이다. 모국어는 역시 모국어다. 생각하는 것, 쓰는 것, 읽는 것을 모국어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리아는 '모국어로'번역하는 것을 '번역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원칙'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유능한 외국인 번역자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가에 달려 있다. 제 아무리 외국어 구사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한국 사람이 한국 문학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을 해서는 그 문학성을 외국인에게 인정 받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이 점은 입장을 바꿔 외국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을 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외국 문헌의 우리말 번역에는 해당 외국어에 대한 소양과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번역에서 이보다 훨씬 더 핵심적인 요소는 역시 한국어 표현 능력이다. 수치로 표현하자면,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100%라고 할 때 '외국어 실력'과 '전문 지식'이 각각 25% 정도 비중을 점한다면, '우리말 구사 능력'은 50% 이상 필요하다. 보는 입장에 따라 수치가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지만, 우리말 표현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해외 번역가 지원책 절실
이런 의미에서 일본문학의 영어 번역자로 널리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1921-2007)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등 일본 현대문학의 3대 거장의 작품을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옮겼으며, 특히 <설국> 의 명 번역으로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설국>
요컨대 한국문학을 깊이 사랑하는 제2, 제3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나올 수 있는가 여부에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좌우된다. 한국 문학에 매력을 느끼는 해외의 번역가·문학도에 대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책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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