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화두가 된 시대다. 삶은 불안하고 의지할 것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시대,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자신을 탐색하는 '길 찾기'가 문학이라면, 문학은 걷기와 일맥상통한다.
맑고 서정적인 시어로 현대인들의 지친 삶을 위로해온 정호승(59) 시인이 바다를 따라 난 작고 아름다운 제주의 고샅길 '올레'를 걸으며 독자들과 시와 문학의 향기를 나누는 시간을 함께했다. 문학사랑ㆍ교보문고ㆍ진에어 공동주최로 15~17일 열린 제2차 '제주올레 녹색 문화투어'에 참가한 정씨는 30여명의 독자들과 올레를 함께 걷고 작품낭송회와 문학강연회를 가졌다.
첫날인 15일에는 제주 우도의 관문인 천진항에서 산호로 만들어진 서빈백사를 지나, 액막이용 방사탑들이 해안을 따라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는 16.1㎞의 우도 올레길 걷기 행사가 열렸다. 정씨는 "밭을 가로질러 난 작은 길들, 억새, 돌, 아기자기한 집, 고려청자 빛깔인 바다의 물빛 등 우도를 걸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은 신비다'라고 생각했다"며 "올레 걷기는 '제주라는 시'의 갈피갈피를 들추며 걷는 행위와도 같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귀포 숙소에서 이어진 시 낭송회와 문학강연에서 그는 시 읽기를 통한 삶의 성찰행위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정씨는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인 시 '부드러운 칼'과,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라고 시작하는 시 '바닥에 대하여'를 낭송했다. 그리고 "시는 밥을 짓는 데 필요한 물과 같은 존재다. 물이 없으면 생쌀을 먹고 살 수밖에 없다"며 "시를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겠지만, 인생이라는 밥솥에 시라는 물이 들어간다면 육체의 배부름뿐 아니라, 영혼의 배부름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와 함께 행사에 초청된 성우 배한성(65)씨는 "시와 관계 없는 것 같지만 나 역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의 목소리 연기를 했던 시인"이라며 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낸 뒤, '이별노래' '강변 역에서' 등 사랑과 이별에 관한 정씨의 시편을 낭송했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데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지만, 어떤 드라마보다도 긴 여운이 남지 않는가"라고 물은 배씨는 "정호승 시인의 시어는 보석의 언어다. 시는 물질이 줄 수 없는 풍요로움을 우리 인생에 선사한다"고 말했다.
16일에는 표선 당게포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원포구로 이어지는 올레 걷기, 17일에는 삼봉산 자락 외돌개에서 월평까지 걷는 올레 걷기가 이어졌다.
소설가 김주영, 영화배우 고두심씨가 진행한 지난달 제1차 투어에 이어 이번 행사에도 참가했다는 이희복(52ㆍ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씨는 "결혼 전에는 시집도 많이 읽곤 했는데 삶이 각박해져 그럴 마음의 여유를 내지 못했다"며 "사각 틀만 놓으면 어디든 그림이 될 것 같은 제주의 풍광을 감상하며 좋아하는 시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11월(12~14일) 행사는 소설가 박범신씨, 12월(10~12일) 행사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진행한다. www.munsa.org 참조, 문의 (02)2266-2132
제주=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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