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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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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밥생각

입력
2009.10.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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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릿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 머리 가득 밥 생각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밥 생각이 나서 밥 한 그릇에 대해 사유하는 시인. 이 시는 1994년에 나온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이라는 시집의 첫머리에 놓여있는 시이다. 김기택 시인은 시집 뒤편에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마음이란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육체이다.' 그 말을 곱씹으면서 이 시를 다시 읽어보자.

밥 생각을 간절히 하는 마음. 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먹고 난 뒤는 얼마나 풍요로울까. 하지만 밥을 먹고 난 뒤 '배가 든든해지면' '오만가지 잡생각 머릿 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진다고 그는 적었다.

배고픔이라는 욕망은 육체의 것이지만 그 육체의 욕망이 채워지면 마음은 투정을 하기 시작한다. 뚱뚱해지기 시작한다. 육체의 본성을 마음이 이루어내는 순간, 모든 '밥 생각'의 욕망을 지긋이 누르는 '밥 생각'에 대한 사유…, 바야흐로 우리는 욕망의 세기를 아직 살고 있다. 스러져가는 북극의 얼음을 생각하자.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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