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근처에서 큰애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만나면 한번 더 눈이 간다. 이 시간에 이곳엔 웬일일까, 입시 준비를 하느라 벌써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학년에 따라 이름표 색이 달라 몇 학년인지 대번에 알 수 있지만 뒷모습이라도 대충 학년을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교복 엉덩이의 반질대는 정도에 따라서이다. 언제부턴가 큰애의 교복 치마도 닳고 닳아 번들대기 시작했다. 식초를 묻히고 무도 문질러보지만 그때뿐이다. 키가 자라 치마 길이가 부쩍 줄어든 것도 그때쯤인 듯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복 자율화가 되는 바람에 우리는 중학교 3년 동안만 교복을 입었다. 그때도 닳아서 번쩍이던 교복이 싫었다. 미래엔 옷감도 좋아지겠지 생각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교복은 한결같이 번쩍거린다.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아이들의 엉덩이에 한참을 웃었다. 여기저기서 번쩍이던 교복 치마, 수많은 시간 교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증거다. 하도 책상에 팔을 문질러댄 통에 간절기용 카디건도 팔꿈치가 해어진다. 그럼 학교 앞 가게에서 여러 동물 모양의 아플리케를 단다. 고생했다, 번들대는 교복에, 그 주인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바로 그런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은 선배가 어쩌다 길에서 군인을 볼 때마다 눈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건.
소설가 하성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