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른 정운찬 총리를 옹호한답시고 김지하씨가 작심하고 시비를 걸었다. '한마디로 X같아서…' 신문 글 초유의 쌍욕에 다들 경악했다. 진보논객 진중권씨가 받아 '말년을 저렇게 추하게 보내야 하나' '노욕' 운운하며 김씨에게 한껏 야유와 조롱을 퍼부었다.
여기에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이 끼어들었다. "(진씨가) 너무 쫄랑거리는 것 같애.…그냥 뭐 개가 짖는구나 이 정도로 들립니다." 진씨 또한 가만있을 수 없을 터. '이 분 아직 선종 안 하시고 살아 계셨군요. 고령화 문제, 참 심각합니다.…개 수준에 미달하는 분들은 개소리를 귀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해요.'
이 정도까지 나가 있다. 모두가 나름 우리사회 최고 수준의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이들이다. 지식인들 간(둘은 서로를 그렇게 인정하진 않지만 아무튼) 욕지거리는 급기야 송사로까지 비화했다. 보수논객 변희재씨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라고 칭한 대목을 걸어 검찰이 진씨를 형법상 모욕죄로 기소한 것. 진씨는 "변씨도 나를 그렇게 불렀다"며 맞고소를 선언했다. 학식깨나 자랑하던 이들끼리 법정에서 저 자가 나를 욕했니, 안 했니 다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으니 딱하기 그지없다.
난무하는 시정잡배 수준의 언어
이것도 우리사회 갈등 표출의 한 형태일진대, 이해의 대립과 갈등은 전체주의체제가 아닌 한 당연한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견해를 빌리자면 대립과 갈등은 사회의 중심적 구성원리이자, 민주주의의 정치사회적 기반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이 이 필연적 갈등의 원인을 규명하고 중재하며 현실적 적용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칠고 감정적인, 나아가 인신공격적 언어가 개입되면 발전적 계기가 돼야 할 갈등이 치유 불가능한 파괴적 양상으로 바뀐다.
이런 식의 논쟁에서 자주 중심에 있는 진중권씨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장바닥에서 떠도는 말을 정제하고 담론화해 합리적 대안을 끌어내는 것'을 '먹물'들의 임무로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마따나 '독설이 필요한 사회에서의 악역'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무지 수준이 낮아 소통이 되지 않는 '(수구)꼴통'들을 각성시키려면 수단으로서의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의미쯤으로 이해된다.
문제는 그런 시도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느 틈에 갈등의 본안은 사라지고 감정에 겨운 치졸한 말싸움만 남는다. 앞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사뭇 치열한 논쟁거리가 될 법했던 정 총리 자격문제 논의는 김지하씨가 그야말로 확 싸질러버린 욕설과 함께 처음부터 깨끗이 실종됐다.
이건 갈등의 조정을 통해 사회통합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를 해체하는 짓이다. 다들 알다시피 갈등의 가장 나쁜 형태는 감정적 대립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초적으로 수습 불가능이다.
공공적 담론의 장에서 지식인들의 어법이 상스러워지기 시작한 건 과문(寡聞)한 기억에 따르면 김용옥씨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좌충우돌 사방에 퍼부어댄 그의 독설과 막말은 대상들을 아예 돌아앉게 만듦으로써 아마도 그가 의도했을 기존 학계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뜬구름 같기 십상인 대중적 열광과, 비슷한 어투로 되돌려진 숱한 비난들을 얻었다.
막말로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해
한 번 물꼬가 트이면 그 다음은 별것 아닌 법. 적잖은 지식인, 엘리트들이 슬금슬금 이 시류에 발을 담갔다. 사실 지난 정권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도 그 상당 부분은 대통령과 측근의 어법에 대한 거부감이 정작 실현코자 한 가치나 정책목표의 정당성을 가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오늘도 역시 시정의 뒷골목에서, 술자리에서, 혹은 교실 뒤편에서 우리 지식인들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논쟁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을 터이다. "뭐, 당신? 너 몇 살이야!" "너라니. 이 X같은 놈이!" 애당초 무엇 때문에 시작됐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상관도 하지 않는 그런 다툼들이.
이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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