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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 뭇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衆口삭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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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 뭇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衆口삭金)

입력
2009.10.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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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702~737 재위) 때 순정공(純貞公)이란 사람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수로(水路) 부인과 함께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부인이 바위 끝에 핀 진달래꽃을 탐내자, 암소를 끌고 지나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이 향가가 '헌화가(獻花歌)'이다.

'자주 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물고 들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길을 지나던 노인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삭金)"이라 하여 뭇 백성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했으니,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부르고 막대로 언덕을 치라고 했다. 태수는 이 말에 따라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불러 부인을 돌아오게 했다는 것이 '해가(海歌)'라는 한역 시로 따로 전한다.

<삼국유사> 에는 수로부인을 둘러싼 이런 두 가지 사건을 전하고, 두 번 모두 신기한 노인이 나타나서 '중구삭금'으로 천기(天機)를 발하는 민중의 말을 강조해 보였다.

부임하는 태수로서 백성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하라는 가르침이었을 터이다. 2008년 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도 신문들은 이 '중구삭금'의 고사를 이끌어 민중의 말을 중시했다.

10월 상달은 한글날이 들어 있고, 특히 금년 한글 반포 563주년 기념일에는 세종로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 임금의 거대 동상이 세워지고, 문화부가 생기면서 초대 이어령 장관의 절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에서 빠진 한글날 공휴일론도 다시 공론화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하늘 뜻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대로 쓸 수 없음을 걱정한 <훈민정음> 창제의 백성사랑 정신은 어디로 가고, 관공소 현판에 버젓이 'Hi Seoul', '일어서自!'가 도대체 어느 나라 국어란 말인가?

<훈민정음> 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도 10년에, 자랑스런 한글문화는 일본식 한자문화와 영어몰입교육 풍토와, 인사 청문회에서 보는 정치 지도층의 거짓말 공해 속에 이 나라 교육 대계까지 뿌리 채 흔들고 있다.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이 글이요, 글이 말이다. 하느님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다."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말도 정말 이렇게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 같이 남에게(외국어)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돼요.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 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어 있어요."

한글날 세시 반이면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이런 정음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는 다석 유영모 선생이 그리운 아침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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