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독 연방정보국(BND)이 동독을 엿본 스파이 기록이 처음 공개됐다. BND는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한 비밀 기록문서 수천 쪽을 최근 시사주간 슈피겔 지에 공개했다. 이 기록은 방대한 스파이 기록의 일부이다. 그러나 서독 정보기관이 장벽 너머 동독을 어떻게 염탐했는지, 또 얼마나 제대로 살피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슈피겔은 이 기록을 분석한 뒤 냉전시대 소련의 KGB, 미국 CIA, 영국 MI6를 앞섰다는 평판을 얻었던 BND가 실제로는 동독의 역사적 변화를 올바로 보지 못한 '무능한 스파이'였다고 평가했다.
■BND의 평판이 마냥 헛 된 것은 아니었다. 동독군에 대해서는 아주 정통했다고 한다. 공산당 하부조직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국과 지도부의 동향은 거의 몰랐다. 단적으로 1989년 7월루마니아에서 열린 바르샤바조약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호네커 공산당제1서기가 갑자기 귀국하자 "회담에 불만을 가진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호네커는 담낭 질환이 악화, 급히 귀국해 절제수술을 받았다. 한 달뒤, BND 국장은 콜 총리에게 "호네커는 췌장암말기로 위독하다"는 정보 보고를 올 렸다. 그러나 당시 76세의 호네커는 5년이 지난1994년 5월까지 생존했다
■그에 앞서 89년 6월, BND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소련군 철수를 경고했다고 정보 보고를 했다. "대중의 불만으로부터 공산당과 지도부를 지켜주기 위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는 내용이다. 이어 8월부터 동독인들이 헝가리 등지의 서독대사관에 몰려들어 망명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동독주민 사이에 '종말'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불과 2주 뒤 "주민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거나 체념한 나머지 순응할 것"이라고 엇갈린 예측을 내놓았다. 민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슈타지 등 보안기관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9월 호네커가 일선에 복귀하자 "소련의 압력을 수용해 개혁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10월17일 정치국 회의에서 퇴진 압력을 받은 호네커가 전격 사퇴한 뒤에도 "후임자는 질서 있는 변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민중시위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 11월9일 정치국이 여행자유화를 발표하자 "주민 신뢰를 위한 조치"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BND의'무능'은 훨씬 여건이 열악한 우리 정보기관의 대북 정보력을 걱정하게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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