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의 세종시 문제 처리 과정을 보면 한 편의 잘 짜인 시나리오를 보는 듯하다. 첫 단계는 정운찬 총리의 등장이다. 그는 총리 내정 소식이 전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종시 수정론을 꺼냈다. 청문회 인준이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하는 그로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모험이자 도박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야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비난을 퍼부어도 아랑곳없이 소신임을 거듭 강조했지만 전형적인 여론 떠보기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2단계는 절대 아니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 총리 발언에 "세종시는 원안대로 가는 게 당론"이라며 펄쩍 뛰었다. 청와대는 아예 말 문을 닫아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회견에서 기자들에게 세종시 관련 질문을 하지 말도록 했다.
슬그머니 변경 가능성을 시사하는 게 3단계다. 정정길 대통령실장은 지난 주 오랜 침묵을 깨고 "정운찬 청문회를 계기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고,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도 "정부에서 어떤 의견이 나온다면 세종시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인지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세종시 건설 원안 변경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이들의 발언을 신호탄으로 한나라당에서 구체적인 방법론이 속속 제시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세종시 이전 변경 프로젝트'쯤으로 이름 붙여질 시나리오의 마지막 단계는 정부가 "짠~"하고 수정안을 내놓고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마지못한 듯 따라가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이다.
이 무슨 음모론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시나리오의 실체가 있었든, 없었든 간에 정부가 세종시 이전을 원안대로 추진할 거라고 믿은 국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는 충남 연기ㆍ공주의 정부청사 이전예정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감지됐던 터다. 기획재정부, 국토해양부 등 5개 중앙정부가 자리잡게 될 연기군의 중앙행정타운 1단계 2구역 공사는 두 차례나 발주가 연기됐다. 세종시 마을 조성사업을 진행중인 건설사들은 사업 자체가 불투명하자 계약을 해지하는 등 일찌감치 발을 빼왔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을 보면 세종시 이전 문제가 다분히 정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부와 여당은 걸핏하면 "세종시로 재미 좀 봤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세종시 이전의 태생적 한계로 제시하지만 세종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는 이 정권도 자유롭지 못하다. 세종시법 자체가 이전 정권에서 여야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은 그렇다치고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대선 때 충청권의 표를 의식해 세종시 원안 추진을 수도 없이 강조해 왔다. 그리고 이제 막상 이전고시를 해야 할 때가 닥치니까 어떻게 하면 조용히 발을 뺄 것인가만 골몰하고 있다.
이 정권이 정치적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바람만 잡는 사이에 세종시 수정론을 둘러싼 국론 분열이 심각한 양상이다. 정치적 타산과 여론의 동향을 저울질하는라 시간을 끄는지 모르지만 해결이 늦어질수록 국력 낭비만 눈덩이처럼 커질 뿐이다.
정부는 더 이상 이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수정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 안을 갖고 냉철한 국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뜸을 너무 오래 들이면 밥을 망치는 법이다.
이충재 부국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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