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정치인이 공식석상에서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을 했다가 삼천포 시민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사천시로 통합된 이 지역 주민들을 욕되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제 이 말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데 주의해야 하는 관용구가 되어 버렸다.
쉼과 소통의 장소
그런데 이제는 "빠지는"것이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본격적인 관광 철을 맞이하여 자기 고장을 소개하는 "00체험", "00한마당", "00아가씨 선발대회"같은 지방자치단체 홍보 광고는 사실 "우리 고장에 빠져 달라"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질래야 빠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고속도로다. 30분, 1시간이 걸렸던 길을 5분, 10분 만에 주파해 버리는 고속도로에서는 잠시 한 눈 팔다 보면 목적지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직선으로 뻗은 새 길에 밀려난 국도나 지방도는 고추나 햇곡식 같은 가을걷이를 말리는 건조대 역할로 전락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가수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라는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 죽을 만큼 뛰다가는 /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그렇다.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황금빛 들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허수아비, 해질 녘 산촌 외딴 집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도 지나칠 수밖에 없다. 금방 한 밥 냄새와 그 속에 묻혀 있는 정겨운 이야기를 어떻게 맡고 들을 수 있겠는가.
지난 여름 아세헌이라는 전주의 한옥에서 하루 밤 묵은 적이 있다. 자그마한 뜰을 중심으로 "ㅁ"자로 된 전통 한옥이었는데 현대식으로 개조한 다섯 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었다. 창호지로 댄 문풍지를 뚫고 들어온 아침햇살에 기분 좋게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어 젖히니 왠 외국인들이 중정을 중심으로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나를 제외한 투숙객 모두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잠시 내가 외국에 와 있나 하는 착각에 빠졌다.
멍하니 있기를 10여분 지났을까, 간밤에 늦게 와 보지 못했던 여주인이 아침 장을 보았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손님들에게 미안해하며 뒤늦게라도 모닝콜을 하겠다고 하더니 대청마루에 앉아 가야금을 뜯는다. 귀에 익은 아리랑인데 마침 뜰에 흐드러지게 핀 자줏빛 맨드라미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신선한 아침 공기와 가야금의 청음이 몸 안의 찌든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것 같았다.
사생활을 극도로 중시하는 서양식 호텔문화나 낯선 사람끼리 온천에서 맨 몸을 보여주는 일본식 료칸 문화와 달리, 우리의 전통 숙박문화인 주막은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다음 행선지를 앞두고 고단한 몸을 쉬어 가는 곳이다. 몇 날이고 머무르면서 떠날 채비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어 가던 길을 되돌아가 인생의 행로가 바뀌기도 한다. 쉼과 소통과 배움의 장소였던 것이다.
역사와 문화 담은 관광산업
정부는 틈만 나면 녹색산업을 이야기한다. 녹색성장을 한다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것은 왠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진정한 녹색산업 중 하나는 여행과 관광업이라 할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빠져서 몇 날이고 머무르게 하는 것이 이 산업의 숙제다. 보여줄 것이 자연 경관과 인공 건조물밖에 없는 나라들과 5,000년 역사와 유려한 문화를 가진 우리는 다르다.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연주하는 거문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정지를 추어내는 춤사위, 바탕색을 칠하지 않는 한국화, 여백이 있어 아름다운 서예.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채우지 않은 공간에 있다. 속도감이라는 시간에 자리를 내어준 머무름과 여백의 공간을 되찾는 것이 관광산업과 녹색성장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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