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용카드 신청서 쓸 때도 직위, 직책란을 항상 비워놓을 수밖에 없어요. 직업란에 '배우' 하나만 쓰면 되잖아요. 그것처럼 배우는 그냥 배우로 끝내야 해요. 직위에 대한 관심도 없고 뭘 맡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감투에는 별반 욕심이 없었다던 영화배우 박중훈이 '굿 다운로더' 캠페인본부 공동위원장이라는 묵직한 직함을 얻었다. 1986년 '깜보'로 충무로에 발을 디딘 그가 특정 단체의 장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굿 다운로더 캠페인본부는 영화를 온라인에서 합법적으로 다운로드 받자는 캠페인을 내년 1월께까지 펼치는 임시단체다. 영화진흥위원회, 불법복제 방지를 위한 영화인협의회가 주도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후원하고 있다. 지난 9일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캠페인 선포식을 열고 정식 활동에 들어갔다.
그동안의 불법 다운로드 근절 운동이 '하지 말라'는 제지형이었다면, 굿 다운로드 캠페인은 권유형 사회 운동이다. 박 위원장은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영화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시대 흐름"이라며 "다만 합법적으로 봐 달라는 게 우리 운동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박 위원장의 영원한 영화 동지인 안성기가 그와 같은 명함을 얻었다. 박 위원장은 "'싱글벙글'이라는 배우들 골프모임에서처럼 안 선배가 회장 하면 난 항상 부회장으로 따라다녔다. 그런데 안 선배가 이번엔 책임을 더 공동으로 나누자고 제안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 '라디오 스타' 등에서 콤비를 이루며 스크린 안팎에서 한국영화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굿 다운로드 관계자는 "두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참여를 적극 권했다"고 밝혔다.
삐딱한 눈으로 보면 그저 얼굴마담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박 위원장은 불법 다운로드와 관련된 수치들을 죽 열거하며 그런 오해를 일축했다. 그는 "2006년 기준 한국영화의 합법적 시장 규모는 1조 3,000억원, 불법 다운로드 시장은 6,000억원"이라며 "불법 다운로드는 스크린쿼터 축소보다 한국영화계에 더 치명적"이라고 강조했다.
"불법 다운로드는 탁송료만 내고 물건값을 안 내는 것과 같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창작자에게 돈이 전혀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면 배우들 일자리도 사라집니다. 합법 다운로드를 하면 당연히 돈을 더 내야 하지만 그게 바로 정상입니다. 물론 영화계가 풍성한 콘텐츠를 합리적으로 제공해야겠죠. 화장실은 마련해놓고 노상방뇨 금지를 외쳐야 하니까요."
그는 이번 캠페인이 짧은 시간에 수치상의 큰 성과를 얻어낼 것으로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콩나물에 물을 주면 그 물이 다 흘러내리지만 결국 콩나물을 자라게 한다"며 "의식 전환 운동이 종국적으로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합법 다운로드의 확산을 위해 그는 "지상파TV 광고 방송이 필요하고, 정부의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고도 말했다. "주무 부처인 문화부가 적극 나서야죠. 불법 다운로드는 영화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음반과 출판, 방송 모두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저희 운동이 알차게 전개되면 출판계, 음악계와도 연대할 계획입니다."
합법 다운로드의 전도사로 나섰다지만 배우는 배우. 그는 "최근 빼고, 자르고, 태우고, 기르며 본업을 했다"고 말했다. 14일 촬영에 들어간 영화 '무릎 꿇지 마'에서 날렵해진 턱선과, 짧은 머리, 까무잡잡하면서 수염이 돋은 얼굴의 깡패 역으로 88만원 세대 여인과의 사연을 연기한다.
부산=글ㆍ사진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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