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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립 장애청소년합주단의 공연/ 마음으로 연주, 베토벤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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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립 장애청소년합주단의 공연/ 마음으로 연주, 베토벤 바이러스

입력
2009.10.1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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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오르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했고 위태로웠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 앞 사람의 옷깃을 잡은 아이들은 한걸음씩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제 덩치의 반 만한 클래식 기타를 어깨에 멘 지연(19)이가 살짝 기우뚱거렸다. "얘들아 천천히! 악기 때문에 잘못하면 넘어져." 맨 앞에 선 지도교사 신연서(26)씨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웅성대던 객석도 순간 조용해졌다.

실은 무거운 악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길을 밝히는 '눈'은 교사의 손길과 앞 사람의 옷깃뿐. 9명의 아이들 중 6명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무사히 제자리를 찾은 아이들 사이에서 이내 활기가 돌았다. 제각기 가방에서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등을 꺼내 매만지는 손길이 분주했다. 500명 가량 모인 객석 이곳 저곳에서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뭘 보고 연주를 하는 거지?" "악보를 아예 외운다더군요." "아이들이 참 대단하네요."

서울 성북구청이 마련한 주민문화공연 '뜨락예술무대'가 열린 지난 10일 저녁 성북구민회관. 4명의 교사와 함께 오프닝 공연을 맡은 성북구립장애청소년합주단의 초중고생 단원 9명 중 6명은 시각장애아들이다. 세계맹인협회가 시각장애인 권익 증진을 위해 제정한 '흰 지팡이의 날'(10월 15일)을 기념해 마련된 무대였다.

지휘자 김수범(41)씨의 손이 올라가자 3명의 아이들만 고개를 살짝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긴장한 채 귀를 세웠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피아노 앞에 앉은 편곡담당 교사 이유진(21)씨가 건반을 눌렀다. 음악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곧바로 지휘자의 손이 허공을 젓자 악기들이 일제히 소리를 냈다. 구민회관엔 동요 '섬집아기'의 선율이 잔잔히 울려퍼졌다.

'섬집아기'에 이어 '재즈왈츠' 등 3곡이 더 이어졌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딸 지연이를 지켜보던 어머니 김명숙(48)씨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난 지연이는 자폐증까지 겹쳐, 보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대소변조차 가리지 못해 주변에서는 '시설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까지 했어요."

지연이가 캄캄한 마음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열 네 살 때 접한 클래식 기타 덕분이었다. 기타 레슨을 받으면서 지연이는 전에 없이 "기분좋다"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하루 3시간씩 연습을 빠뜨리지 않던 지연이는 2007년 전국청소년음악경연대회에 나가 은상을 수상했다.

어머니 김씨는 "한 번은 지연이의 공연을 본 젊은 여성이 찾아와서 '우울증으로 자살하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꿨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며 "말할 수 없이 벅찼다"고 말했다.

피아노를 맡은 인호(13) 어머니 박정아(42)씨도 표정이 밝아졌다. 생후 한 달째 녹내장에 걸렸던 인호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모두 19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다. 박씨는 "늘 혼자였던 아이가 합주단에 참여하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씩씩해졌다"고 말했다.

악보도 지휘도 볼 수 없지만, 아이들은 기억 속에서 음표를 끄집어내고 마음 속에서 지휘를 그린다. 이유진 교사는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데, 곡 한 마디마다 일일이 박자의 세기나 음을 기억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범 지휘자도 "음의 흐름에 따라 지휘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해 줘서 아이들이 마음 속으로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다.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지만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듯했다. 지연이는 "주변이 조금 어수선해서 잘 못한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고, 바이올린을 맡은 민태(11)는 "예전에도 공연을 해봤기 때문에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날 공연은 지난 7월 출범한 성북합주단의 네 번째 무대였다. 합주단의 모태는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이 2003년부터 운영해온 '성북장애인예술단'으로, 성북구청이 올해 재정지원을 결정하면서 구립예술단체로 재출범했다. 서울시 자치구가 직접 운영하는 장애인예술단체로는 유일하다.

합주단이 탄생하게 된 데는 시각장애인인 심남용(60)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관장의 힘이 컸다. 심 관장은 "30년간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시력을 잃은 후 죽고 싶었을 때 하루 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생명의 끈'이었다"며 "시각장애 아동들도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우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합주단에 참여한 비장애 학생들에게도 장애인 친구와 함께 하는 연주는 남다르다.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형준(11)이의 어머니 허유선(41)씨는 "형준이가 합주단에 참여하면서 시각장애인인 동생에게 더 잘한다"고 말했다.

바이올린 파트를 맡은 세영(12)이는 "장애인 친구라고 해서 다르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며 "그냥 여럿이랑 함께 연주를 하니까 덜 떨리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세영이 아버지 정병일(44)씨는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항상 상대방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성북합주단은 17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2009 세계장애인문화예술축제'에도 초청돼 연주할 예정이다.

강성명 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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