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적어도 재미가 첨가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설교도 재미가 없으면 아무도 안 들어!' 바야흐로 재미는 신의 자리와 맞먹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방영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언급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제 의견을 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오락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재미'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특정한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속이는 사람들의 진지함은 이를 데 없습니다. 거짓을 얼마나 정성 들여 치밀하게 준비하는지 속는 사람은 자기가 부닥친 일에 자기를 겨눈 어떤 속임수가 들어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만 거짓이 치밀하고 진지할수록 속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들을 그 만큼 더 신뢰합니다.
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도식을 갖습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우선 속는 사람의 순수하고 진정한 마음에다 자기네 덫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속는 사람이 자신의 온 마음을 기울여 반응하도록 상황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숱한 속이는 사람들이 에워싸고 다면적인 접근을 합니다. 이른바 총체적인 기만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다양한 전면적인 기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윽고 속는 사람이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황당해집니다. 갑작스러운 당혹, 절망적인 허탈, 그리고 깊은 바닥에서 이는 배신감 등이 한데 어우러져 소용돌이칩니다.
그렇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그의 표정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속인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속임 놀이'를 했다고 속은 사람에게 자신들의 한 일과 의도를 밝힙니다. 악의가 전혀 없었던 일이라면서 그를 위로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면서 유쾌하게 웃습니다. 짐작하건대 그 순간 속은 사람의 당혹은 창피함으로 바뀌고 허탈은 가중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를 터트릴 수도 없습니다. 결국 쓰디쓴 실소(失笑)와 더불어 '당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당했구나!'하는 불운을 스스로 처연해하면서 그 상황을 멍청하게 끝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희희낙락합니다. 통쾌한 웃음이 터지고 '재미'있었다는 찬탄이 입니다. 속은 사람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그 재미는 배가합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은 더 없이 흐뭇할 것입니다. 의도가 적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이 프로그램은 사람을 속여 골탕을 먹이고는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놀이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만과 가학의 재미'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방영하면서 이를 보면 모두 행복할거라는 현실인식과 철학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록 놀이라 할지라도 좋은 놀이가 아닙니다. 못된 놀이입니다.
'재미'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킬킬거리며 웃을 수는 있지만 그 재미가 지닌 '웃을 수 없는 구조'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소박하게 내가 속임을 당한 사람이 되어보면 결코 모든 사람이 웃는 자리에서 나도 덩달아 웃을 수 없는 어떤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재미나 즐거움은 '무고(無辜)한 사람을 속여 아프게 하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합니다.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들지 않더라도 놀이의 속성 중에 '속임'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합니다. 놀이에서의 속임은 그것이 부풀림이든 감춤이든 비틂이든 놀이를 놀이답게 하는 요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겪어 압니다. 놀이를 놀이답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악의적인 기만과 늘 부닥치곤 하는 것이 삶인데 이처럼 활짝 웃고 끝날 수 있는 '무사(無邪)한 기만'이야말로 오히려 긴장과 해이(解弛)를 즐겁게 출렁이게 하여 삶을 생동하게 하는 유용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재미'에 대해 도학자적인 잣대를 들이대면서 옳으니 그르니, 선하니 악하니 하는 것은 옹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재미는 재미일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재미 아닌 다른 잣대로 그 의미나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현실에 발을 대고 사는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비판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삶을 살아보았다면 당연히 함께 껄껄 웃고 그칠 일을 자기가 너그럽지 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넉넉함에 시비를 거느라 바쁜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미는 재미일 뿐'이라는 말로 재미 논의를 닫아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에나 가치나 의미가 없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재미도 예외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재미인지를 주장하는 '재미 철학'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속임 놀이'에 대한 어느 편의 의견이 옳은지 택일적인 판단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둘을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기까지 공연한 논쟁은 삼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미가 절대화된 사회', '절대화된 재미에 의해 모든 가치가 수렴되는 문화'를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든지 '왜 그렇게 행동하니?'하고 물었을 때 '재미있으니까!'하는 한마디에 어떤 물음도 침묵하고 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살이가 온통 '속임 놀이'만 같습니다. 상식도, 합리적 사유도, 비판적 지성도, 감상적 낭만도, 경건한 의례도, 창조적 상상도 그렇게 일컬어지는 표제와는 달리 모두 '재미 장터'에서 신바람 난 속임 놀이판 같이만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마침내 속였다!'는 쾌감과 '재수 없이 속았다!'는 허탈함 사이에서 킬킬거리고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오늘의 정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뿐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속임 놀이의 기획과 연출이 어떤 일도 하지 못할 바 없는 절대성을 발휘하며 재미를 낳는다 할지라도 그 재미 또한 누구도 웃지 않을 '때'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재미있어 하지 않으면 재미는 스스로 소멸합니다. 그것이 '재미'와 '재미 주체'의 운명입니다.
늘 즐겁게 살기를 바랐다고 해서 쾌락주의자로 불리는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때'를 짐작케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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