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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마음'이 빠진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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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마음'이 빠진 재판

입력
2009.10.1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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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가 시사기획 '쌈'에서 '전자 발찌 1년, 내 아이는 안전한가'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던 9월 말, 친구들과 점심 모임이 있었다. 한 친구가 그 프로에 나온 성폭력 피해자 '나영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거의 다 10대의 손주들을 가진 할머니들이어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폭행을 당하면 몸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이번에 알게 됐어. 그 8살짜리 아이는 성기와 항문이 찢어져서 대장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정도였고, 기능 회복이 어려운 상태라고 하네. 그런데 아이를 교회 화장실로 끌고가 목 졸라 기절시킨 후 폭행한 57세의 범인은 전과 17범에 성폭행 전과도 있다는데 겨우 12년 징역형을 받은 거야."

"1심에서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판사는 범인이 만취상태로 변별력이 없었다는 점 등을 감안해 12년 징역형을 선고했대. 무기징역을 구형했던 검찰은 왠지 항소를 포기했고, 범인은 형이 무겁다면서 대법원까지 갔는데, 12년 형이 확정된 거야.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원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대."

"가슴이 떨려 말을 못하겠네"

모두 식사를 중단했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한꺼번에 외쳤다.

"그건 아니지. 그럴 수는 없지."

"피해자의 상태가 그토록 참혹한데, 가해자의 만취상태를 고려해 형을 낮춰준다는 게 말이 돼?"

"아직도 남녀차별 하는 거야? 우리나라가 문명국가 맞아? 검사도, 판사도 그 여자 아이가 당한 일과 그 애가 살아갈 일생을 진심으로 생각해 봤다면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 그런 기계적이고 형식적이고 냉담한 재판을 할 수 있어? "

"가슴이 떨려 말을 못하겠네. 이런 분노가 쌓여서 어느 날 민란이 일어나는 거겠지?"

민란(民亂)이란 단어가 나올 만큼 우리는 분개했고,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대장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온 8살짜리 소녀를 보며 그토록 기계적일 수 있는 재판에 우리는 공포를 느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이런 분노가 번지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비난과 개탄이 들끓고 있다.

"살인사건 등 다른 판결과 비교하더라도 징역 12년과 전자 발찌 부착 7년은 결코 가벼운 형이 아니다." "대법원에서까지 형이 확정됐는데 더 무거운 형을 내리라는 것은 사법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등등의 주장이 사법부 안팎에서 나오고 있지만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신문 인터뷰에서 "일시적인 여론에 의해 형량이 오락가락 하면 사법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국민의 법 감정과 법원의 양형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양형 기준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법관 출신인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성범죄 양형이 너무 가볍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성범죄를 중죄로 보지 않는 잠재의식이 있거나 법원이 다른 범죄와의 형식적 형평성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죄질이 나쁜 범죄는 중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오히려 형평과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며 법원은 변명을 하기 전에 먼저 양형 기준을 재검토하고 법관들의 양형 감각을 다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영이 사건'이 울린 경종

이귀남 법무장관은 범인에 대해 가석방 없이 엄격하게 형을 집행하겠다고 약속했고, 정치권에서도 유기징역의 상한선을 높이는 등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을 엄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영이 사건'은 국민의 법 감정과 법원의 양형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경종을 울렸다. "그 참혹한 '나영이'를 보면서 당신의 마음은 어디 있었느냐"고 국민은 검찰과 법원에 묻고 있다. '기계적인 판결'이었다는 질책, "성범죄를 다루면서 남성위주의 잠재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질문도 피하기 어렵다. 마음을 열고 '나영이 사건'의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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