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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우라 부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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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우라 부르지 마세요

입력
2009.10.12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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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축직전의 한우입니다. 최근 '쇠고기 가격 강세, 한우 최고등급(1++)가격 사상 최고치' 등 소식에 저희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너무 억울해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한가위 특수에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한 게 직접요인이지만 배후세력은 따로 있습니다. 이왕 하직할 몸, 그들을 고발(?)하고 여러분의 식탁으로 가려 합니다.

매서운 쇠고기 판관, 등급판정사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우리는 등급을 남깁니다. '1++, 1+, 1, 2, 3등급.' 권한은 올해 설립 20주년을 맞은 축산물등급판정소의 판정사(전국 260명)가 쥐고 있죠. 이들이 대충 했다면 쇠고기가격도 적당한 선에서 그럭저럭 타협이 이뤄졌을 겁니다. 2등급을 1등급으로 슬쩍 고쳐 가격을 낮추면 그만이니까. 소비자가 알 턱이 없죠.

판정사들이 어찌나 깐깐하게 점수를 매기는지 죽어서도 서러울 지경입니다. 소의 마지막 등뼈와 제1 허리뼈 사이를 잘라 나타난 등심 단면적만, 그것도 섭씨5도 이하여야 하고, 검사항목도 5개(육색 지방색 근내지방 성숙도 조직감)나 됩니다.

혹자는 "고기(肉) 색은 선홍색, 지방은 우유빛깔, 잘 퍼진 마블링(근내지방), 나이(성숙도)는 30개월 이상이 좋다"고 쉽게 풀어 말하지만, 조견표를 일일이 대조하고 미세한 탄력과 질감을 확인하는 작업은 내공과 숙달된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경계가 애매한 건 또 어떻습니까. 보기에 따라 1등급 같기도, 1+ 같기도 한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죠. 축산농민이 "사정 봐달라" 읍소하면 살짝 등급을 올려줄 법도 한데 에누리 없습니다. 목살 엉덩이까지 죄다 확인합니다. 한우깨나 먹었다는 전문가가 "마블링이 아름다워 1++로 보이는데, 왜 1등급을 줬냐"고 따졌다가 맛을 본 뒤 판정사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세상살이 융통성이 너무 없다는 걸 본인들도 압니다. '공명정대'가 입에 붙었습니다. "등급판정 이후 한우산업 농가소득이 2,482억원 증가했고"(박종운 충북지역본부장), "농가에 정확한 등급 데이터를 알려줘 이후 품질 개량을 돕고"(권기문 판정사), "소비자가 믿고 우리 쇠고기를 사먹을 수 있다"(한효동 판정사)는 자부심 때문이랍니다.

판정사의 무기, 쇠고기 이력시스템

그러나 이들의 노고는 늘 얌체상인들에 의해 묻혀왔습니다. 애써 판정을 해도 유통과정에서 수입육이 국산으로 둔갑하고, 2등급이 1등급으로 뒤바뀌는 일이 허다했으니까요. 그러나 올해 6월부터는 불가능해졌죠. 쇠고기 이력제가 본격 가동(시범사업은 2004년부터)된 덕분입니다.

원리는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소는 모두 12자리 개체식별번호를 받습니다. 인간들의 주민등록번호처럼. 귀에 부착해 '귀표'라 불리는데, 현재 340만 마리(한우는 270만 두)가 해당됩니다. 귀표가 없으면 도축자체가 안되니 '유령 소' 혹은 '부정육'의 유통자체가 차단된 셈이죠. 게다가 호적이나 각종 경력증명처럼 정확한 등급을 비롯해 모든 이력정보가 담겨있으니 판매상이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게 됐죠.

실제 제가 도축될 충북 청원군의 ㈜한국냉장에선 소가 계류장에 들어오는 즉시 휴대용단말기(PDA)로 귀표에 찍힌 개체식별번호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위생검사관은 브루셀라병검사증명서를 확인한 뒤 도살과정 중 내장검사를 하죠. 도살 뒤에 다시 번호를 확인하고, 판정사는 DNA조회를 위해 시료(0.5g)까지 채취합니다.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로 역 추적이 가능하게 되는 거죠.

예전 같으면 명절 대목을 맞아 부정육이나 허위 등급제품을 암암리에 내놓았을 양심불량 상인이나 식당주인들도 진짜 국내산 쇠고기를 들여올 수밖에 없어 가격이 뛰었다는 게 판정사들의 진단입니다.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한가지 확실한 건 돈은 좀 더 들더라도 안심하고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전엔 속이는 통에 3등급짜리를 1등급 가격 주고 먹는 사례도 있었으니 제값 주고 사먹는 지금이 오히려 저렴하다"(박 본부장)고도 합니다.

읊다 보니 되레 고발이 아니라 '변호'가 되고 말았군요. 백정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딛고 오랜 기간 일군 성과라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한우와 육우 구분도 잘 못하면서 엉성하게 자꾸 "좋은 부위" 운운하시는데, 차라리 "이력"을 물으십시오. 판매상이 긴장할 겁니다. 매일 7,000명 정도(하루 평균 이력 조회건수)의 똑똑한 소비자는 이미 이용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만 떠납니다.

기자가 녀석의 부고를 전한다. '개체식별번호: 002 007 673 877, 출생: 2007년 3월 15일 충남 천안 북면, 종류: 암컷한우, 도축일자: 2009년 10월 6일, 육질등급: 1+등급.'

청원=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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