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한국은행에 들어가 일하면서 점심은 주로 중화각에서 외상으로 먹었다. 중화각은 지금의 미도파에서 명동 쪽으로 길 건너에 있는 2층집이었는데 언젠가 도로를 확장하면서 헐려 없어졌다. 이 집의 자장면은 값이 싸면서도 유명하게 맛이 있었는데 사인을 해놓고 먹고 나면 월급날에 수금원이 와서 받아 갔다.
2002년 내가 한은 총재가 되어 수소문한 결과, 그 때 중화각 종업원이 지금 을지로 6가 밀리오레 빌딩 앞에서 동화반점이라는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다고 해서 두어 번 찾아 간 일이 있는데 그 때 그 맛이 아니었다. 내 입맛이 바뀌어서인지도 모른다.
이 때 우리가 자주 갔던 집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명동의 부민옥과 용금옥, 소금구이 집으로 오륙도, 곰탕집으로 하동관 등이 생각난다. 일이 끝나면 그 어려운 속에서도 무교동과 명동으로 술을 마시러 몰려 다녔다.
소주집과 대포집을 주로 다녔으나 맥주집에도 갔다. 그 때는 비어홀이라 하여 개방된 넓은 공간에 많은 테이블을 놓고 맥주를 팔았는데 요청하면 여종업원들이 나와 술도 따르고 앞에 나가 춤도 같이 추어주었다.
한국은행에 입행한 지 1년 뒤인 1962년 5ㆍ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4ㆍ19혁명으로 태어난 장면내각은 1년도 안 돼 무너지고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그 해 가을에 중앙공무원 교육원의 이세규 원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 때 군사정부는 전국의 사무관 이상 공무원, 중ㆍ고교 교장과 대학 총ㆍ학장, 국영기업체장 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동국대학 옆에 중앙공무원 교육원을 설립하고 이세규 대령(국회의원 역임ㆍ작고)을 원장으로 임명했다.
그 분은 나에게 한국경제론 강의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강사 발령을 받고 한은에 근무하면서 매주 대여섯 시간씩 약 3년간 한국경제와 개발정책에 대해 강의하였다.
대학을 갓 나온 스물여섯 살의 풋내기가 그러한 자리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박희범 교수의 추천이 있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내 담당 과목은 수강생들의 강의 평가에서 항상 인기과목의 하나였으며 그 당시 교육원 교육 대상자는 대부분 내 시간을 거처 갔다. 이 때 한은 안에서도 신입행원ㆍ초중고급 관리자 과정 등 각종 연수에 있어서 나는 이 때부터 경제부문의 단골 강사로 차출되었다.
그 무렵 혁명주체들이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고 있었다. 계엄치하의 삼엄했던 그 때 어느 날 낯 모르는 두세 사람이 한은 사무실에 찾아와 나를 지프차에 태워 갔는데 창문을 가려서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위층으로 보이는 어떤 분이 나의 공무원교육원 강의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들은 차기 정권의 주체로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함께 하자는 것 이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달라고 했더니 국회나 정부에서 일할 기회가 있음을 내 비쳤다.
며칠 시간을 달라 해놓고 돌아 왔다. 큰 기회인가 아니면 큰 함정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에 관여 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다짐을 어길 수 없어 정중히 사양 했던 바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내게 또 하나의 중요한 갈림 길이었다. 그 길로 갔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달렸을 것이다.
1968년 2월 나는 7년 만에 대리급 조사역으로 승진했는데 이 때 연구조사역 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어 최명걸 조사역(대우 자동차 사장)과 내가 연구조사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연구조사역이란 6개월 동안 현업에서 손을 떼고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에 전념하는 제도인데 이 제도가 발전하여 오늘날의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이 된 것이다.
나는 이 기간 중에 '한국의 공업화 약진과 그 전개과정'이라는 논문을 써서 1·2부로 나누어 68년 10월1일자로 발표하였으며 이것을 합해 다음해 6월에 나에게는 최초의 저서인 <한국경제 성장론> 이라는 책을 일신사에서 펴냈다. 한국경제>
지금 생각하면 내놓기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경제개발의 시동단계에 있었던 당시 한국경제의 개발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
1968년에 한국은행에 입행해 근무하다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재무부로 옮겼던 양만기 투신협회장은 2002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승씨는 내가 한은에 입행했을 때 한국경제에 대해 강의했는데 그 감명이 오래 갔으며 1969년에 펴낸 <한국경제 성장론> 은 그 무렵 고시 지망생들에게는 필독서였다"고 술회하였다. 한국경제>
다음해인 1969년 가을에 나는 미국 연방준비은행으로 9개월간의 연수를 떠났다. 나로서는 최各?해외여행이었다. 그 때는 여권과 비자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워 해외에 간다는 것이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출국한다고 하면 온 가족 친척이 김포공항에 나와 환송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나도 처와 아이들 그리고 친척들의 환송을 받으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싸구려 셋방을 얻어 지내면서 처음 타보는 지하철을 타고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나가 미국 중앙은행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배웠다.
6개월 뒤에는 워싱턴으로 옮겨 연방준비이사회에서 석 달 동안 금리와 통화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배웠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이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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