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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 손에 든 염주가 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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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 손에 든 염주가 왜 사라졌을까

입력
2009.10.07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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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梨花)에 월백(月白)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봄밤의 애상을 담은 이 시조는 고려 문신 이조년(1269~1343)의 작품이다. 이조년은 여말 혼란기에 파당을 짓지 않고 곧은 소리를 곧잘 한 것으로 전한다. 200여년 뒤 퇴계 이황(1501~1570)은 "도학의 근본은 충절"이라며 그를 높이 평했다.

비슷한 시기 성주목사 노경린(1515~1568)이 영봉서원을 세우며 그를 배향(配享)하려 했다. 그런데 율곡 이이(1536~1584)가 반대하고 나섰다. 성주 안봉사 영당(影堂)에 모셔진 초상화가 문제였는데, 그림 속 이조년은 원나라 복식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호불(好佛)한 인물을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는 율곡의 공론은 당시 사림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여말선초 정치·사회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일화로, 이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옛 자료들이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됐다. 이조년의 후손인 성주(星州) 이씨(李氏) 문중에서 전해 내려온 초상화 27점과 족보다. 한중연은 기탁받은 자료의 의미를 살피는 학술대회를 7일 관내 장서각에서 연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이장경(1214~?)부터 이욱(1562~?)까지 14명이다. 원본은 아니고 후세에 옮겨 그린 이모본(移摹本)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림은 자연히 삭기 마련인데, 성주 이씨 후손들은 수십년마다 이를 베껴 그리는 방식으로 초상화를 보존했다. 문중은 1655년부터 1925년까지 약 30~80년 간격으로 이모 작업을 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이모본은 1714년 본이다.

한중연의 윤진영 연구원은 "이 초상화들은 모두 이모의 시기가 기록된 기년작(紀年作)들로, 시대별로 이모의 관행과 초상의 양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1714년 본은 이전 시기의 고식적 양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1746년 본은 명암법과 입체감의 표현이 보이기 시작한다. 19세기 이모본들은 강렬한 채색이 특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초상화들이 모본의 형태를 정확히 옮겨야 한다는 이모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초상화들은 미술사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가 기록된 자료로 가치를 갖게 됐다. 예컨대 18세기 이후 이모된 이조년의 초상에는 율곡이 문제 삼았던 염주가 삭제된 채, 염주를 쥐었던 왼손이 어색하게 들려 있다.

이포(1287~1373)의 초상에는 이런 변화가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염주가 검은 염료로 지워지더니(1714년 본), 아예 삭제되고(1746년 본), 결국 어색한 왼손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허리띠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다(1825년 본). 그러나 원나라 양식의 둥근 모자는 그대로 살려 둬, 고려시대의 모본이 억불숭유의 사회 분위기와 절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와 함께 기탁된 '성주이씨족보'에서는 남성 중심의 가계 기록이 정착하기 전의 사회적 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장경은 아들 5명과 딸 1명을 뒀는데 족보에는 큰아들 백년 다음에 딸이 기재되고, 그 뒤로 천년, 만년, 조년, 억년 등 아들이 차례로 기재돼 있다.

또 고려 말에는 사위를 아들보다 먼저 기록하거나,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은 "고려 시대까지는 부계적 친속관계가 아니라, 양측적 친속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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