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유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유물을 꼽으라면 단연 신라 황금보관을 들 것이다. 이 금관은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은 물론, 그 화려함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고구려, 백제에서도 임금이 권위의 상징으로 관을 썼음이 출토된 유물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신라금관에 비길 바 못 된다. 신라금관의 가치는 단순히 순금으로 만들어 졌다거나 그 형태가 독특하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신라인들의 권위와 예술적 경지에서 비롯된다.
무덤에 묻혀 있던 신라금관이 처음으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1921년 일제강점기 때였다. 발견된 장소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주시 로서동에 있었는데, 금관이 출토된 경위가 매우 흥미를 끈다.
발견 당시 이 무덤을 등지고 일대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신라시대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단순한 언덕 정도로 알고 봉분을 깎아 집을 짓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 집들 중 고분군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도로 서편에 조선시대 때부터 주막이 있었다. 주막이란 오늘날의 개념으로 여행자를 위해 마련된 간단한 음식점인데 술과 음식을 팔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 음식점을 겸한 숙박시설이다.
당시 주인인 박씨는 장사가 잘 되어 손님이 많아지자 가게를 늘리려고 뒤뜰을 넓히는 작업을 하다 우연히 부장 유물들을 발견하게 됐다. 무덤임을 몰랐기 때문에 신라무덤을 파괴하는 줄도 몰랐다. 금관이 출토되기 전 땅 속에서 유물들이 흩어져 나오자 신기하게 여겨 일 하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너도 나도 주워갔다.
그런데 소문이 삽시간에 경주 일대에 퍼져 당시 파출소 순경의 귀에 들어갔다. 순경은 급히 소문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되어 땅 고르기 작업을 중단 시키고 자신의 상관인 경찰서장에게 즉시 서면으로 알리면서 지시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어 부랴부랴 총독부박물관에서 달려오고 당시 초등학교 교장 등이 주축이 되어 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2~3일 만에 조사를 완료하고 수많은 신라 유물과 함께 최초의 신라 황금보관을 발굴했던 것이다. 이 때 파괴된 신라무덤에서 발굴된 금관이 바로 금관총금관으로 국보 87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실의 진열장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발굴된 지도 88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도 금관의 주인공이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신라금관이 출토된 큰 무덤이란 뜻에서 금관총이라 이름 했지만, 이 금관이 과연 임금이 썼던 것인지 아니면 장례용이나 특수목적으로 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5~6세기경 만들어 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확한 제작시기도 명백하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어쨌든 이 금관총금관을 온전하게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소문을 확인하고 즉시 집 짓는 작업을 중단시킨 한 파출소 일본인 순경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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