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면, 무엇이든 24시간 안에 가져다 대령할 것이다."
전 스위스 정치인으로 유엔 인권문제 자문역을 맡았던 장 제글러는 '영세 중립국가' 스위스의 현주소를 이 같이 '통탄'했다.
수많은 정치 망명자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도피처가 돼왔던 스위스가 오랜 전통의 '정치 중립'과'금융 비밀주의'라는 양 날개를 모두 잃어가고 있다.
32년 전 미국에서 13세 여아를 성추행 한 혐의로 미국이 지명수배한 로만 폴린스키 감독이 최근 체포된 곳도 스위스다.
폴린스키 감독 체포는 강제송환을 원하는 미국과 석방을 요구하는 프랑스, 폴란드 등과의 사이에 외교전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이 사건은 스위스 내부에선 '중립주의'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낳고 있다.
올해 스위스 투자은행 UBS가 고객 비밀주의를 깨고 처음으로 탈세 의혹자 명단을 미국 법무부에 넘긴 일이 있었던 터라 스위스 국민들의 반응은 더욱 민감하다.
제네바 시민 줄리앙 그롤리에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중립이어야 할 스위스 정부가 지금 미국 편을 들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스키가 묵었던 별장 주인 어네스트 슈레츠는 "스위스가 창피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30일에는 스위스 외무부 대변인이 "스위스 영사가 이란에 억류된 미국 시민 3명과 면담하기로 했다"며, 사실상 미국을 대신해 미국 시민 구출 작전에 나설 것임을 밝혔다.
중립국이어서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하지 못한 스위스가 이처럼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것은 조세피난처로 각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다 세계화가 가속화하면서 중립국가로서 독립을 지키는데 한계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2002년 유엔에 가입하고, 2007년 각국 독재자들이 스위스 계좌에 갖고 있던 비자금을 해당국가에 돌려준 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스위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중립주의를 앞세워 나치 독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의 반공주의 광풍을 피해 망명한 영화 천재 찰리 채플린에서부터, '상품중개의 왕'이자 조세포탈범 마크 리치에게까지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스위스 정부는 "조세포탈은 스위스에서 죄가 아니지만, 성추행은 죄"라며 폴란스키 감독 체포를 애써 옹호하고 있다.
스위스는 UN의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 동참을 거부하는 등 중립주의 유지에 애쓰고 있지만 스위스 계좌도, 스위스로 도피한 사람도 모두 예전만큼 안전하지는 않다는 분석이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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