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 동안 내 얘기를 듣고 자란 세대, 내 말을 듣고 발을 굴렀던 그 젊은이들은 다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늙은 백기완이는 아직 현장에 있는데 말야."
백기완(76)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반독재·통일 운동에 매진한 '한살매(일생)'를 회고록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겨레출판 발행)로 묶어 냈다. 사랑도>
소꿉동무 이야기부터 시작해 전쟁과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질곡의 시간, 울고 웃으며 거리에서 부대꼈던 지난 세월의 기억을 담았다. 29일 서울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책을 펴낸 이유를 "좌절과 실패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나를 키운 것은 밥도, 책도 아니야. 그렇다고 깨우침이나 철학도 아니고. 좌절과 절망이 날 키웠어. 좌절만 먹고 자랐으니 내 몸뚱이는 파행적이야. 그걸 글로 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쓴 건, 지금 젊은이들의 모습이 더 절망적으로 보여서야."
백 소장은 요즘 젊은 세대가 역사나 사회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백기완이라는 이름도 모르는 대학생들이 많다는 지적에 그는 "그건 내 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라, 오늘의 현실, 역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본주의는 올바른 역사든 일그러진 역사든 자꾸 잊어버리게 만들어. 학교에서부터 싸워서 이기는 것만 가르치니까. 결국은 좌절과 절망을 강요하는 거야. 그래서 평생 좌절과 절망을 먹고 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라고 썼어."
백 소장은 민주화운동 못지않게 순우리말을 살려 쓰는 데도 큰 역할을 해 왔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의 낱말을 만들어 퍼뜨린 사람이다. 이번에 낸 회고록도 영어단어, 한자어 하나도 섞어 쓰지 않고 순우리말로 썼다. 그는 "그늘에 가리고 땅에 묻힌 무지랭이 말이 많다. 이런 말은 우리 갈마(역사)와 함께 빚어온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정치보다 시(詩)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구체적 사실보다 문학적 감성이 묻어나는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책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고 하자 백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밤을 새면 어떤 사람은 햇빛을 본다고 그러는데, 이슬밖에 없는 사람은 해가 뜨면 사라지게 마련이지. 이 책은 날이 밝자마자 이슬처럼 사라질 그런 책이야."
유상호 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