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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브로셀리앙드 숲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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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브로셀리앙드 숲의 전설

입력
2009.09.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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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서북부의 브르타뉴 지방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말은 '전설의 땅'이다. 거친 바다와 원시의 들판, 비바람, 안개, 벌판에 우뚝 솟아 있는 거석들, 떡갈나무 숲, 그리고 앵글로 색슨에게 쫓겨 온 켈트인들의 험난한 삶과 고난의 역사는 이 땅에 많은 전설을 잉태시키는 조건들이었다.

브르타뉴에서도 가장 전설이 많은 곳이 브로셀리앙드 숲이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였던 아리마데의 요셉은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마셨던 성배를 들고 팔레스타인을 떠난다. 요셉이 도착한 곳은 브로셀리앙드 숲이었는데, 한 동안 이 숲에 머물던 그는 아무런 종적도 남기지 않고 예수의 피가 담긴 성배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훗날 아더 왕은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 원탁의 기사를 이끌고 이 숲을 찾아온다. 켈트인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이었으며 적으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언젠가 돌아온다는 신념을 남겼던 영웅. 그 아더 왕의 모험이 바로 이 브로셀리앙드 숲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이다(아더 왕의 전설은 영국의 글레스턴베리, 콘월 등을 배경으로 하지만 켈트족이 프랑스의 브르타뉴에 정착하면서 이곳에서도 아더 왕의 신화가 발생한다.).

숲에는 아더 왕의 신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돌아오지 않는 계곡'에 이르면 깊고 신비로운 호수가 펼쳐진다. 신검 엑스칼리버가 요정의 손에 들려 물 밖으로 치솟아 오를 것만 같다. 숲 한가운데 있는 펭퐁 마을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폐허가 다 된 콩페르 성이 나타난다. 요정 비비앤이 태어난 곳이며 그녀가 '호수의 기사'랜슬럿을 데려다 키운 성이다.

또한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 그리고 마법사 멀린이 머물던 곳이다. 콩페르 성의 망루와 외벽은 심하게 부서지고 돌 위로는 이끼와 무성한 풀만 자라고 있으니 그 옛날 위대한 영웅호걸들의 모험과 아름다운 요정들의 잔치가 무상하기만 하다.

잠시 이 지방에 머물던 나는 한국에서 지인들이 찾아오면 판에 박힌 관광보다 유럽의 무형문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그들을 이 숲으로 안내하곤 했다. 일정상 이 숲과 파리 여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는 "혹시 잃어버린 성배를 찾지 못하더라도 '마법의 숲'을 걸어 보는 것이 파리 관광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여행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신화는 최고의 철학이라고 했듯이 신화를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우리에게 사색의 힘을 되돌려주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감동을 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땀을 뻘뻘 흘리며 수 킬로미터의 숲길을 걸어서 한 개의 소박한 돌무더기 앞에 도착해 이것이 '마법사 멀린의 무덤'이라고 말했을 때 분명 일행들의 찬탄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더 걸어서 요정 비비앤이 마셨다는 '늙지 않는 샘'앞에 이르러 "이 물을 마실 때마다 한 살씩 젊어진다"고 말했을 때도 감탄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의 찬탄이 아니라 실망과 후회의 탄식이었다.

에펠탑도 올라가지 못한 그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파리만 가득했던 것이다. 센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밤에는 화려한 리도 쇼를 보겠다고 별러왔던 사람들이 평범한 숲을 헤매다 돌무더기와 샘물 앞에서 감동을 강요 받고 있으니 원망들이 터져 나올 법도 하다.

이후로 나는 지인들과 여행할 때면 상식적인 관광도 안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딸깍발이에게 속아 입이 석 자씩 튀어나온 일행들을 데리고 귀가하던 그때의 썰렁한 풍경이 떠오르면 지금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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