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숫자로 말합니다."
올해 3월 KT와 KTF 합병으로 통합 KT 초대 수장을 맡은 이석채(64) 회장은 KT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대뜸 숫자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숫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행정 고시(7회) 합격으로 공직에 첫 발을 디딘 곳이 경제기획원이었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84년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거쳐 국가 재정을 주무르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재정경제원 초대 차관, 96년 정보통신부 장관을 두루 지낸 뒤 97년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을 끝으로 관가를 떠날 때까지 그의 화려한 공직 생활은 숫자와의 싸움이었다.
한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그가 선택한 곳은 국내 최대 통신 기업 KT. 직원 3만7,500명, 올해 매출 목표 19조원, 영업이익 1조 8,000억원. KT를 대표하는 숫자들이다. 업계에서도 숫자와의 질긴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이 숫자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을 지 28일 이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정부가 통신비 인하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통신서비스업체로서 부담일 텐데요.
"통신비는 당연히 낮춰야 합니다. 특히 휴대폰을 이용한 무선 인터넷 비용을 낮춰야 합니다. 앞으로 미래는 무선으로 데이터 통신이 이뤄지는 시대입니다. 무선으로 인터넷을 쓰면서 재산 다 날리는 기분이 들면 안되죠. 사용한 만큼 요금이 어느 정도 나올 지 예측 가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유ㆍ무선통신 결합서비스(FMCㆍFixed Mobile Convergence)를 이달 중순께 선보일 것입니다. FMC는 단말기 하나를 집에서 값 싼 인터넷 전화로, 외부에서 휴대폰으로 사용하는 서비스입니다. 그만큼 비용 부담이 적죠. FMC가 본격화하면 이용자들의 통신 환경이 크게 달라질 겁니다."
-미국 애플의 휴대폰 아이폰을 들여오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아이폰은 소비자에게 새로운 만족을 주고 통신 서비스, 휴대폰 제조업, 콘텐츠 개발 등 국내 정보기술(IT) 업계 전체에 큰 자극이 될 겁니다. 항상 발전은 경쟁을 통한 자극과 긴장이 있을 때 이뤄집니다."
-반면 KT에서 적극 추진하는 휴대인터넷(와이브로)은 무선 인터넷 시대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와이브로를 이용한 음성 서비스에 대한 기대가 큰 편인데요.
"우리처럼 이동통신이 전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는 음성통신은 기존 이동통신으로 충분합니다. 문제는 무선 인터넷 같은 데이터 사용입니다. 현재 이동통신으로는 수많은 무선 데이터를 감당하기 힘들죠. 와이브로는 데이터 통신에 유리합니다. 이를 확대하기 위해 이동통신, 와이브로, 고정형 무선인터넷(와이파이) 등 3가지 서비스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전화기가 곧 나옵니다. 이 단말기가 나오면 음성통신은 3세대 이동통신으로 해결하고 무선 인터넷은 와이브로로 사용하게 됩니다. 와이브로 수요가 그만큼 커지죠."
-97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옮기고 나서 이원종 당시 정무수석과 함께 국정을 좌우해 '좌원종 우석채'로 불리며 타고난 경제 감각을 발휘하셨습니다. 이제는 기업인이 되셨는데, 과거 관료 생활과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우선 자유롭습니다. 공직에 몸담으면 제한이 있죠. 기업인은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습니다. 대신 결과도 금방 나타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과와 책임이 명확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죠. 이제는 정책이 아닌 숫자로 말해야 합니다. 기업은 이익을 내고 성장을 해야죠. 즉, 수치로 보여 주는 게 중요합니다."
-회장에 취임하신 뒤 파격적 외부 인사 영입도 화제가 됐습니다. 인사 원칙이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책임있게 잘 할 수 있느냐는 거죠. 공무원이든 기업인이든 중요한 것은 책임성 있는 결단을 잘 내려야 합니다. 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살아온 과정을 보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과 책임을 졌느냐가 중요하죠. 모든 것을 다 갖추면 좋겠지만, 신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은 이상 책임감을 갖고 일을 잘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초한지에서) 한신은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서 지났지만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진평은 흠이 많았으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습니다." (한신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였고 진평은 승상이었다.)
-앞으로 KT 회장으로서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목표는 KT를 활기차게 성장하는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겁니다.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KT 관련 인력은 10만명입니다. KT가 잘못되면 10만명의 안위가 문제입니다. 국가적 충격도 크죠. 그만큼 KT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요즘 KT의 사업 환경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집전화를 쓰지 않으려 들고, 각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까지 KT망 대신 자체 통신망을 갖겠다고 합니다. 사방이 온통 경쟁입니다. 경쟁은 치열하고 식구는 많고. 여기에 KT는 국가 비상사태때 국가통신망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업이면서 공공 기관의 책임성이 필요합니다. 이 같은 이중적 자세가 KT의 또 다른 도전입니다. 특이하죠.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KT는 잘 살지만 산업기반이 황폐화되거나 KT가 살기 위해 중소기업이 죽는 일은 용납 못합니다. KT가 잘 되면 중소기업도 활력을 되찾고 산업도 도움을 받는 건강한 경제 환경을 만드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많은 보고를 받고 의사 결정을 해야 하니까 늘 맑은 상태로 머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큰 과제죠. 매일 맨손 체조와 팔굽혀펴기를 꾸준히 합니다. 때로는 14~ 15㎏이 되는 손자를 안고 꽤 먼 거리를 걷습니다. 골프는 잘 못합니다. 1988년 3월에 시작했는데 4개월 만에 90타를 깼습니다만,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시절 골프 금지령이 내려 계속 칠 수 없었죠. 지금은 100타 정도 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이번에는 이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요즘 언론도 환경이 급변해서 어려움이 많죠?"
-쉽지 않습니다.
"전자책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최근 모 업체에서 만든 전자책을 선물 받았는데, 이런 기기를 이용한 신문 서비스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려면 전자책을 갖고 다닐 수 있도록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것을 유행시키면 좋을 겁니다. 모든 게 끝은 없으니까요. 고민해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모든 게 끝은 없으니까요"
■ 이석채 KT 회장 프로필
1945년 경북 성주 태생으로 서울 경복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해박한 경제이론과 명쾌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90년대에 경제 및 정보통신(IT) 부문과 관련된 정부의 주요 부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 분야 전문가로 널리 알려졌다. 2008년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9년 3월에는 KT 그룹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인터뷰=조재우 산업부장
정리=최연진 기자
■ 이석채 회장이 이끈 변화바람, 화상회의·소사장제…확 바뀐 KT
이석채 회장 취임 이후 KT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올레(Olleh)'. 이 회장이 제 2 창업을 선언하며 7월부터 회사의 구호처럼 내건 올레는 헬로(Hello)의 영문철자를 거꾸로 쓴 것이다. 여기에는 혁신적 사고를 통해 보다 앞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발상 경영과 '미래가 온다'는 뜻의 한자 발음(올 래ㆍ 來), 환호와 탄성을 나타내는 감탄사 등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공기업이었던 KT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이다. 이후 KT가 선보인 '올레' 광고 시리즈는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획기적인 인재 채용도 화제다. 김일영 그룹전략팀장, 한동현 경영시너지 부문 상무, 석호익 대외협력부문장, 표삼수 기술전략실장 등 요직에 외부 인사를 발탁했다. 여기에 개인고객(양현미 전무), 홈고객(송영희 전무), 기업고객부문(이영희 전무) 등 3개 부문 전략본부장을 모두 여성으로 배치했다.
기업 문화도 달라졌다. 고객에 맞춰 회사를 홈고객, 개인고객, 기업고객 등 3개 부문으로 개편하고 각 부문을 책임지는 소사장제(CIC)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 임원들이 경기 분당 본사에 모여서 진행하던 회의도 시간 절약을 위해 화상 회의로 바꿨다. 관리직도 대거 영업 현장으로 내려 보내 경험을 쌓도록 했다.
어찌나 변화가 빠르고 심한지 KT 직원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라고 표현했다. 이 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기술과 서비스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공적 변화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주도한 변화의 바람이 어떤 숫자(실적)로 뒷받침 될 지 관심이 쏠린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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