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브 지음 · 허지은 옮김/문학세계사 발행 · 192쪽 · 1만원
또 죽음이다. 아멜리 노통브(42)의 새 소설 <왕자의 특권> 역시 그녀 소설의 단골 소재인 죽음에서 출발한다. 허나 그 죽음이라는 것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은 40대 초반의 프랑스 독신남 밥티스트. 언제나처럼 평범했던 토요일 아침 최고급 아우디 승용차를 몰고 온 사내가 밥티스트의 일상을 뒤흔든다. 휴대폰도 방전되고 공중전화도 고장 나 전화 한 통을 쓰겠다며 현관문을 두드린 사내는 수화기를 들자마자 거짓말처럼 쓰러져 죽어버린다. 왕자의>
구급대에 신고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악마의 유혹처럼 그는 죽은 사내의 신분증과 지갑을 훔쳐본 뒤 "죽으면 유리해지는 것은 없을까?"라는 몽상에 빠진다. 거절하지 못하는 초대의 자리에 안 나가도 되고, 결근을 밥먹듯 해도 되고, 직장동료들은 내 험담 대신 뭉클한 감정에 사로잡혀 나를 추억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사내는 나와 키도 몸무게도 비슷해 보인다.
소설은 올라프라는 죽은 스웨덴 사내의 신분증을 훔친 밥티스트의 '낯선 사내 되기' 경험담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그 경험은 "나는 통 크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짜릿함을 느끼고 싶었다"라는 밥티스트의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궁궐과 같은 대저택, 진기한 음식으로 가득찬 냉장고, 세상의 온갖 와인을 다 쓸어담은 것 같은 지하실의 와인바, 미끈한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짧은 원피스를 입은 저택의 여주인… 낯선 사내로 살아가는 것도 흥분되는데, 죽은 사내는 모든 것을 갖춘 '왕자'와 같은 사내였다.
'하루라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본다면, 그것도 왕자(공주)처럼 살아본다면'이라는 상상은 월화수목금토일 또다시 월화수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들에게 유혹적이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에 쾌락과 안락, 불안과 두려움을 오가는 주인공의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도 일품이다. "왜 여자들은 적게 먹는 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라 생각하는거죠?"처럼, 영화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를 연상시키는 톡톡 튀는 작중인물들의 대사도 재미있다.
노통브는 이 소설을 쓴 직후 프랑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무튼 나는 언제나 사기를 치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언젠가 천하에 나의 사기행위가 드러날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거짓말을 한 뒤 자신의 거짓말에 끌려다니는 주인공 밥티스트가 작가 노통브의 소설적 분신으로 읽힌다는 점도 유의미하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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