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관산읍 송촌리엔 특별한 '김 회사'가 있다. 주주 110명 모두가 김 생산어민으로, 염산이나 유기산 등을 전혀 쓰지 않는 친환경 김을 생산ㆍ판매하는 이 회사의 이름은 '장흥 무산(無酸)김 주식회사'. 왜곡된 농수산물 유통구조를 '손보겠다'며 어민들이 올해 2월 직접 자본금(6억3,500만원)을 출자하고 전문경영인까지 영입해 만든 순수 어민 회사다.
26일 회사 물품창고에서 추석 선물용 상품 포장을 하던 송명섭(59) 사장은 "나랏님도 바로잡지 못하는 불합리한 농수산물 유통구조를 고쳐보겠다는 어민들의 열정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웃었다.
이제 어엿한 '주주'인 어민들이지만 과거엔 중간상인이나 대형 유통업체들에게 늘 당하기만 했던 '봉'이나 다름없었다. 참다 못한 어민들은 결국 "우리도 조직된 힘을 보여주자"며 저마다 쌈짓돈을 투자해 김 주식회사 설립에 나섰다. 주식에 '주'자도 모르는 촌사람들이었지만 관에서 종합저온저장시설을 짓는데 보조금을 주고 행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농어민 주식회사 만들기는 전남도가 농수산업을 기업화해 자생력과 경쟁력을 키우고 미래 성장산업으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농수산업 구조조정 사업. 이를 통해 농ㆍ수ㆍ축산물 유통구조를 개선해 나가겠다는 뜻도 숨어 있다.
이 사업은 지난해 3월 수산업을 대상으로 처음 시작됐다. 어민들이 직접 어업회사법인의 주주로 참여하면 생산수입뿐 아니라 이익배당금까지 챙길 수 있어 경영안정화를 꾀할 수 있다며 어민들을 상대로 품목별 창업스쿨과 설명회를 개최했다. 첫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도는 시설 보조금을 주고, 세제혜택과 수산발전기금 등도 지원할 수 있도록 근거 법령을 마련하겠다며 전담 부서까지 신설하는 등 뜻을 꺾지 않았다. 다만 회사 난립에 따른 경쟁력 약화를 막기 위해 품목별 회사 설립은 지역별로 특화해 18개로 한정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미 장흥 무산김과 완도 전복 생산 어민들이 회사를 설립됐고, 연말까지 신안 새우젓과 조피볼락, 여수들망(멸치), 민물장어 등 5개 품목의 회사 설립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생산에만 힘을 쏟던 어민들이 직접 가공ㆍ유통사업까지 진출,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하고 가격경쟁력도 키워 소득이 오르자 하나 둘씩 회사 설립에 나선 것이다. 장흥 무산김 생산어민 김모(51)씨는 "현재 중간 상인들은 마른 김 1속(100장) 당 2,500원 밖에 안 쳐주지만 어민 출자 회사는 4,000원을 주고 있다"며 "특히 유통단계를 간소화하자 유명 백화점 등 전국 대형 유통업체의 납품물량도 늘고 있어 올해 회사 순이익이 15억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귀띔했다.
유통단계가 줄어들자 소비자가격은 자연스레 떨어졌다. 무산김 주식회사는 추석을 앞두고 선물용(4만5,000원)세트를 전화 주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최대 20%까지 할인해주고 있다. 전복 주식회사도 6만5,000원짜리 추석 선물용(1㎏ㆍ10마리) 상품을 다른 업체들보다 3,000원 가량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유통상의 횡포도 줄어들었다. 전복 주식회사 박래안 사장은 "과거엔 전복 출하 시기 때면 상인들이 일부러 수매를 늦춰 가격 하락을 유도하거나 대금결제를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어민들이 애를 먹었다"며 "어민들이 회사를 설립한 뒤부터 이런 관행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타 지역 어민들의 주주참여 요청도 잇따르고 있다. 최근 강진과 완도의 18개 김 생산 어가가 장흥 무산김 주식회사에 출자를 희망해와 회사 측이 검토 중이다.
전남도는 회사 설립 범위를 농산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24일 나주의 산란계 사육농민 47명이 12억4,000만원을 출자해 '녹색계란 주식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 해남의 배추 농가들도 이달 중으로 회사 설립 등기를 마칠 계획이다. 영암 무화과와 진도 검정쌀, 고흥 석류, 순천 조경수, 광양 밤 등 10개 품목의 생산 농가들도 회사 설립을 추진 중이다.
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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