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2시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의 한 아파트 거실. 배꼽이 훤히 드러난 형형색색의 벨리댄스 의상을 입은 '애기엄마'들이 인도풍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팔과 허리를 돌리고 있다. 치맛자락에 매달린 두 살배기 아이도 덩달아 발을 구른다.
"잠깐, 잠깐. 여기서 스텝이 틀렸잖아요." 벨리댄스 강사 이선미(41)씨가 학생들의 잘못된 동작을 흉내내며 실수를 지적하자, 거실엔 주부들의 폭소가 퍼진다. 거실 한 켠 이불 위에 누워 빙글빙글 도는 엄마를 바라보던 생후 6개월 된 아기들도 빙그레 따라 웃는다.
대전시 대덕구에서 배달되는 것은 자장면만이 아니다. 이곳에선 어학, 건강ㆍ스포츠, 취미 등을 배우고 싶은 강좌를 구청에 신청하면 집으로 강의를 배달해준다. 30대 초ㆍ중반의 여섯 주부가 한낮 가정집 거실에서 벨리댄스를 배울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배달강좌제' 덕분. 주부 이성자(36)씨는"주민자치센터에서 뭘 배우고 싶어도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엄두가 나지 않았었는데 애들 걱정 없이 원하는 걸 배울 수 있어 좋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강사 이씨도"처음에는 집에서 수업한다고 해서 잘 될까 염려했는데 수강생들의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하다"면서 "배달강좌 소식을 접한 다른 지역 주부들로부터 대덕구로 이사 가야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구 등 다른 자치단체가 벤치마킹 하러 올 정도의'히트상품'이 됐지만 배달강좌제는 재정이 열악한 대덕구의'역발상의 산물'이다. 2006년 민선 4기 선거에서 당선된 정용기(47) 구청장은 당초 근사한 평생학습센터를 신축하고 싶었다. 하지만 건축비만 200억~300억이 들어가는 건물은 구청 재정 형편상 어림없는 일이었다.
고심하던 그는"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곰곰 따져보니 명분도 타당했다. 평생학습센터는 공급자 중심으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 데 반해, 배달강좌제는 수요자 중심이며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탄생한 배달강좌제는 올 3월부터 시작됐다. 주민홍보를 위해 관내 곳곳에 철가방을 든 배달원 모습과 함께'학습이 자장면처럼 배달됩니다'라는 안내포스터를 붙였다. 강의를 배달해준다는 게 워낙 생소한 개념이라, 홍보과정에서 철가방과 자장면이란 문구만 살핀 중국집 주인이 '구청에서 자장면까지 배달하면 우린 무얼 먹고 사느냐'고 항의전화를 해온 경우도 있었다.
배달강좌는 관내에 거주하는 구민이나 기업체, 학습기관, 단체 등이 5명 이상의 팀을 구성해 신청하면 된다. 강좌는 특별한 시설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분야에서든 개설할 수 있으며, 구청은 주민들로부터 강좌신청을 받으면 해당 과목에 맞는 강사를 배정한다.
강사는 관련분야 자격증을 가진 사람으로 현재 605명이 등록돼 있다. 올해 총 560개 강좌가 개설돼 200개 강좌는 과정이 끝났고, 360개는 현재 진행 중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며, 교육은 무료지만 학습에 필요한 재료비 등은 수강생이 부담해야 한다.
대덕구는 올해 예산으로 1억4,500만원을 편성했으나, 주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추경에서 2억원을 추가했다. 내년에는 정부의 평생학습 평가 최우수상 상금 2억원을 포함하여 4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배달강좌제에 대한 주민 만족도는 무척 높다. 대덕구 퇴직공무원들의 모임인 행정동우회 사무실에서 8월부터 카메라교육을 받고 있는 강원조(70)씨는"행정동우회 사무실은 보통 바둑이나 화투놀이를 하며 시간을 때우는 장소였지만, 배달강좌 덕분에 사무실이 공부방으로 변했다"고 뿌듯해 했다.
3월 동화구연에 이어 벨리댄스 강좌팀을 구성해서 배달교육을 받은 변서윤(33)씨도"주변에서 친한 사람끼리 집에 모여서 강좌를 들으니 시간 내기도 쉽고 친목도 다질 수 있어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며"이번 강좌가 끝나면 무엇을 배울지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배달강좌제에도 흠은 있다. 교육시간이 짧다는 점. 과목에 배정된 20시간은 기초과정을 마칠 정도의 시간이어서 많은 수강생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대덕시에서 평생학습업무를 맡고 있는 이유진씨는"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마냥 시간을 늘일 수 없는 형편"이라며 "심화과정 학습은 비용이 저렴한 지역자치센터와 연계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덕구는 앞으로 배달강좌제에 자격증 과정을 도입해 저소득층이 무료로 교육을 받고 취업도 할 수 있도록 학습과 복지를 연결시키는 정책도 구상하고 있다.
정용기 구청장은 "도시 선진화의 척도는 번듯한 건물이나 도로, 다리 등이 아灸?주민들의 수준과 만족도"라며 "관내 7만 가구 중 절반인 3만5,000가구만 배달강좌제에 참여해도 지역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허택회 기자 thhe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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