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위기론이 등장한지 10년이 넘었다. 9년 전 조동일 당시 서울대 교수와 홍윤기 당시 동국대 교수를 초청해 인문학의 위기를 주제로 대담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두 사람은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했으며, 인문학의 명맥이 끊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인문학 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크다고 반성하면서도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2006년 가을에는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는 선언문을 대학 교수들이 발표했다.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무차별적인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이 그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도 비슷한 위기감을 토로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가 아니냐,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확산되는 동안 인문학자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저런 논란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래도 뜨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인문학이 위기니 아니니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뭐 하나 뚜렷하게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이고 인문학 위기론은 진부한 것이 돼버렸다.
이런 가운데 제4회 인문주간 행사가 21일 시작됐다. 인문학 최대의 행사이기는 한데, 대중이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이 행사에서 '기업 CEO와 인문학자의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에 눈길이 갔다. CEO 3명을 초청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기업문화'를 주제로 토론회를 한 것이다.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택하고 인문학 보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취업에 훨씬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학생이 많다. 하지만 CEO들은 토론회에서 다른 말을 했다. 지금은 기업도 기획, 마케팅, 생산 등 여러 업무를 통합, 융합하는 시대이므로 여러 분야를 함께 보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인문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 낫다는 것이다. 문학,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과 관심을 고양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기업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직원을 뽑을 때도 인문학 전공자를 우대는 하지 않지만 불이익을 주지도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학생들이 취업을 이유로 인문학을 그렇게까지 경원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일자리 구하기가 워낙 어려운지라 취업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인문적 교양이 약해지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생각도 얕아지기 십상이다. 인문학 교수들의 주장대로 시장논리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자칫 기능적 존재로밖에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기업들도, 토론회에 참석한 CEO들과 생각이 비슷하다면, 직원을 채용할 때 인문적 소양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 어떨까.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더 우수하고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성찰한다고 할 수 없지만, 다양한 인재를 고른다는 측면에서라도 그럴 필요가 있다.
인문학자의 책임은 언제나 막중하다. 스스로 비판한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휘둘리는 모순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분별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학생과 기업과 인문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노력하면 인문학 홀대가 조금은 사라질지 모른다.
박광희ㆍ문화전문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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