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2007년보다 5.4% 늘어난 22억 4,100만톤으로 역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2009년 현재, 기아로 고통 받는 인구는 지난해보다 1억명 증가한 10억 2,000만 명에 달한다. 3초에 한 명씩 굶어 죽는 셈이다.
#2. "돈은 바닥났고, 행복도 물 건너 갔습니다. 고기나 생선, 쌀, 고구마, 콩은커녕 마토케(푸른 바나나를 으깬 것)도 구경한 지 한참 됐습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못 보내고 있어요." 우간다의 커피 재배업자 살로메 카풀루지의 말이다. 그가 농장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kg당 34센트. 실제 중개상들에게 판매하는 가격은 14센트다.
그런데 이 커피는 네슬레나 네스카페 공장에서 가공 처리되는 순간 kg당 26.40달러까지 치솟는다. 이 같은 방법으로 네슬레는 2005년 식품과 음료 수익으로 약 70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른바 '병목 기업'의 가공할 만한 위력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급속한 세계화가 진행되기 전, 지구촌의 빈곤 문제는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오는 정적인 테마였다. 물질적 풍요에 익숙한 세대들은 기관이나 개인을 후원하는 등 이 문제에 인도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국가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가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현 상황에서 빈곤은 더 이상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구호에만 그칠 수 없게 됐다.
<식량전쟁> 을 쓴 라즈 파텔(37)은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가 공존하는 이 구조적 모순의 원인은 '선택'의 권리를 가진 권력들에 있다고 본다. 그는 생산자인 농민들은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선택하여 생산한다고 믿으며, 소비자 또한 원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 모든 것은 유통업체와 식품가공업체가 정한 '강요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 선택의 주체를 바꿔야 전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식량전쟁>
라즈 파텔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연합에서 일했고, 현재 유엔 식량권리 특별보고관, 비영리기관인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판자촌 주민을 위한 웹사이트(www.abahlali.org)를 운영 중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목격한 현장의 불합리한 사례들을 토대로 쓴 이 책에서 식량주권 문제의 심각성과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999년 WTO 회의가 열린 미국 시애틀에서 식량주권을 지지하는 시위를 조직한 것으로도 유명한 그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식량이 필요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분배되고 있으니 최빈국은 항상 배를 곯을 수밖에 없어요. 또 가장 배고픈 사람은 농촌의 임금노동자란 사실은 기아와 식량생산이 어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죠." 실제로 인도 곡창지대인 펀자브 지방은 농민 전체의 3분의 1이 파산 혹은 생존 위기를 겪고 있으며, 스리랑카에서는 살충제 중독이 사망 원인 제6위로 꼽힌다.
피폐한 지구촌 농촌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산량이 증가해도 여전히 세계가 굶주리는 것은 "영주나 왕, 식민지회사(영국의 동인도회사 같은), 대규모 유통업체 등 힘을 가진 주체가 식량의 생산과 소비를 좌우해왔기 때문"이라고 파텔은 말했다.
특히 그는 최근 국내에서도 문제가 된 SSM(기업형 슈퍼마켓)과 같은 유통방식을 문제 삼았다. "슈퍼마켓은 20세기 초 특허를 낸 발명품입니다. 이들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도입했고, 이는 곧 소규모 농민들을 위기로 몰았죠. 소비자는 공간과 위치, 상품의 종류 등 슈퍼마켓의 조작에 좌지우지됐고요." 그는 이들이 크림스키밍(수요가 있는 지역에만 진출하는 경향) 기법을 철저히 적용하고 있어, 농촌이나 할렘가 등엔 식료품점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우려 섞인 전망도 내놓았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식품업계는 민주주의 처방이 시급합니다. 국민들은 '소비자'라는 소극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한 '국민'으로서 대기업을 위협할 만한 적극적인 선택을 해야 하죠." 그는 국민이 민주적으로 식량자급정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WTO에서 농업 부문을 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에서는 식량주권을 되찾고, 기아 퇴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식량정책위원회'가 대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됐어요. 이들은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고, 대기업을 감시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죠."
파텔은 "식량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며 <식량전쟁> 의 후속작을 준비 중이라고도 밝혔다 식량전쟁>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 라즈 파텔 이메일 인터뷰
"한국에서 빈곤은 관심 밖에 내몰린 '암울한 비밀(Dark secret)'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메일 인터뷰에서 라즈 파텔은 2003년 한국 땅을 밟았던 기억을 이같이 회상했다. 그는 그 해 9월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 장관급 회의장 인근에서 이경해 당시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장이 자결했던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한국인들도 꽤 많았죠. 하지만 시골에 터전을 둔 노인들 사이에서 빈곤은 이미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는데 모두가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어요."
그는 이때 느낀 점을 <식량전쟁> 에서도 소개했다. 농산물의 자유무역이 확대되면서 한국에서 연봉 수준이었던 쌀 11가마니의 가격이 월급 수준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떨어졌고, 농민들은 큰 빚을 지자 계를 만들어 이를 충당했는데, 한 명이라도 채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줄파산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그는 썼다. 식량전쟁>
세계화로 결국 굶주리는 것은 무농토, 무자본의 농촌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파텔은 지난해 미국 소 수입과 관려해 열린 촛불집회에 대해 '긍정적인 움직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시장을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미국 기업의 횡포는 한국에서도 예삿일이 되었다"며 "한국인들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거대 기업의 유혹에 수입 농산물 중독자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곡물과 육류를 막론하고 그들의 '행패'에 맞선 것은 고무적이라는 것이다.
파텔은 또 한국에서 최저생계비 수준에 못 미치는 생활을 하는 농촌지역 노인이 50%에 이른다(2005년 농촌경제연구원 조사)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고 소개하며 "한강의 기적과는 동떨어진 충격적인 현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그가 몸담고 있는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의 최근 연구에서 한국은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6대주의 친환경 농업을 분석해보니 한국은 현지 특산물의 '씨를 말리는' 불합리한 경제 시스템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가령 지방 특산물ㆍ농산물 축제 개최 등도 좋은 시도이고요." 지역 경제를 지원하면 거대 자본과 슈퍼마켓에서 소비자와 생산자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그의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라즈 파텔은 누구
1972년 영국 런던에서 피지 출신 아버지와 케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에서 정치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런던정경대에서 석사,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예일대와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아프리카학센터 방문교수이며, 진보적 온라인 웹진 'The Voice of the Turtle'의 공동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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